시환세하
파괴된 도시의 골목 구석길에,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 한 남자가 벽에 기댄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위상력도 없이 이런 위험한 거리에 스스로 발을 들인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썩 좋지 못한 차원종과의 접촉과 함께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미리 빼돌려 준비한 위상관통탄 몇 발과 오래 전 단련한 약간의 체술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어쩔 수 없는 능력의 한계로 인해 결국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종말이 올 듯한 거리. 생존을 위해 거꾸로 생존을 걸어야하는 역설 속에 갇혀버린, 시환의 한숨이 작게 퍼진다.
어짜피 선택권은 없었다. 위상능력자가 되었던 때에도 그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그리고 위상력 상실증을 앓고 난 뒤로도, 일반인이지만 일반인이 아닌 그에게 세상은 스스로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기회를 줄 리가 없었다. 철저하게 관리되었고, 철저하게 버려졌다. 내던져진 그에게 남겨진 마지막 통로 - 벌처스로의 이직 또한 순탄치 않았다. 매 순간 차원종의 틈바구니에서 생사를 걸어야했다. 위상력을 잃어버리면서 망가진 인생에 일말의 희망이 없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이런 무모한 일에 뛰어들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짜피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인생이었다. 뜻을 잃어버린 삶 속에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을 찾아서, 그가 헤매고 있었다.
"...쿠쿡... 제기랄... 이럴 때면 위상력이 없는게 얼마나 아까운지 생각이 난다니깐말야... 크윽..."
아무래도 허벅지 쪽에 부상을 입은 듯 했다. 다리가 썩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급한대로 입고 있던 속티를 찢어 상처부위 지혈에 나선채 차원종의 틈바구니를 매우 조심스럽게 헤쳐야만 했다. 자신을 버려서라도 알아야할 진실이 필요했다. 그 진실이, 시환의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기를 그는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하악... 하악... 그래도 위상력이라도 없으니 저 놈들에게 안 걸리는 건... 썩 좋은 것같진 않지만..."
빗소리에 자신의 거친 숨소리를 묻어둔 채, 다시 길을 나섰다. 무너져내린 건물들과 여기저기 불꽃이 일어난 암흑의 거리. 끊임없는 의심과 두려움이 시환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시환은 이 길이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선택으로 걸어가는 몇 안 되는 길 중 하나임을 끊임없이 상기했다.
"여기... 이 쪽이... 헉... 헉... 맞을 것 같고..."
역삼동 논현로 근처. 언제든지 꺼져버릴 듯한 의식의 불씨를 틀어잡은 채 시환이 도착한 어느 건물의 앞. 온통 유리로 이루어진 벽면이 여기저기 처참히 깨져버리고, 그 잔해가 길거리에 나뒹굴어있는 광경... 썩 보기 훌륭한 광경은 아니었다. 약간은 좋지 못한 느낌을 받은 시환. 그의 사전 조사가 옳다면, 그가 원하는 정보가 이 건물 안에 있을 것이다. 다만, 이 건물에 그가 원하는 정보만이 존재할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 일대는 차원종의 소굴이었고, 어느 골목과 어느 건물, 어느 틈사이에 차원종이 숨어있다가 그의 목숨을 앗아갈 지 알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확실한 사실은...
"...쿠쿡... 어짜피 나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없지."
익숙하다는 듯이 조금은 금이 가버린 유리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불이 켜져있을리 만무한 칠흑같은 어둠 속에 갇힌 시환. 그가 알고 있는 정보는 이 건물에서 지하로 내려가면 그가 필요한 자료, 이 강남사태를 일으킨 배후를 찾아내기 위한 단서 중 하나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정도였다. 빛이 차단된 도시 속 건물을 탐사하는 일은 굉장히 곤란한 일이었다. 지금같은 상황에서 이런 인적없는 골목 건물 속에서 불빛을 들이대며 수색활동을 벌이는 일은 사실상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뭐 그러지 않더라도 이 건물 안에 은신해있을 차원종이 자신의 인기척을 발견하고는 기습해버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불빛이 좀... 필요하겠지?"
준비해온 작은 손전등을 꺼내 불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이 건물에 입주해 영업하던 업체의 심벌과 캐릭터가 반겨주는 데스크를 지나,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굳게 닫힌 채 약간은 찌그러진 철문이 왠지 모르게 스산했지만,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이 지옥같은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살아남던, 죽어 없어지던.
철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뜨겁고 습한 공기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직도 작동하고 있는 수많은 모니터와 전자장치들, 이질적이고 불안했다. 무언가... 수상했다.
"그르르르..."
그리고 그런 불길한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계단을 올려다보자 저 위에서부터 들려오는 차원종의 묵직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뒤로한 채 시환은 더 이상의 판단할 틈도 없이 철문 너머의 방으로 뛰어들어가 문을 닫고 막아섰다. 철문이 찌그러져있는 탓에 잠글 수 없다는 사실에 한탄하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할 것을 다짐했다. 아무리 이미 벼랑 끝까지 몰린 인생이 되어버렸다 할지라도, 이런 젠장맞을 마지막을 맞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쾅!"
귀를 울리는 굉음이 철문을 통해 전해졌다. 이미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그저 철문에 등을 기대는 식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는 시환에게 그 충격이 그대로 전해졌다.
"커헠..."
충격에 나둥굴어버린 시환이 더 가빠지는 숨을 고르면서 뒤를 돌아봤다. 아직은 닫혀있는 철문이었지만, 언제라도 차원종이 부수고 들어올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시환은 마지막으로 준비했던 단 한 발의 위상관통탄을 권총에 장전했다. 철문 너머 차원종의 거친 숨소리와 가동 중인 컴퓨터의 쿨러팬 소리가 넓은 지하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쾅!"
실을 울리는 굉음에 시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잠시의 시간이 지나 눈을 떠보니, 문을 박차고 들어온 드라군의 모습이 들어왔다. 사냥감을 붙들었다는 듯한 기분좋은 그르릉 소리가 들려왔다. 시환은 침을 꿀꺽 삼키며 총구를 겨눴다. 마지막,
"탕!"
단 한 발로 차원종을 제압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만 했다. 감춰진 것들을 밝힐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어짜피 목숨을 걸고 접근한 곳이었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고보니 반드시 살아서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꿈틀거렸다.
위상관통탄을 맞은 드라군이 비틀거렸다. 손이 떨리는 바람에 급소를 비낀 것이 분명했다. 순간 시환의 눈앞이 암담해졌다. 어찌해야 저 차원종을 극복할 수 있단 말인가? 십수년전 빠르고 날카로운 위상력을 휘두르던 그 때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나이가 서서히 들어갔고, 위상력은 이미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무너져내린 인생의 끝에 처참한 죽음이 있을 것임을 예견하는 듯한, 드라군의 성난 숨소리가 들려왔다.
수많은 생각에 갇혀 굳어져버린 시환을 향해 드라군이 달려들어 그의 몸통을 강하게 후려쳤다.
"커억!!"
드라군의 공격에 방어할 틈새마저 없이 그대로 정타를 맞은 시환이 뒤로 붕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이윽고 넓은 방에 엉킨채 널린 책상과 의자 사이에 부딛치며 떨어졌다. 강한 충격에 내상을 입은 것인지 입에서는 피가 토해져나오기 시작했다. 단 한 방에 의식이 혼미해지려는 시환에게 드라군이 다시 접근했다. 시환은 흐려진 시야로 간신히 옆 책상에 손을 짚고 일어났다. 한 많고 더러워진 인생의 끝에 서는 자의 비참함과 더불어, 생의 마지막을 향하는 서러움, 결코 포기하기 싫은 것들에 대한 집착이 다시 불타올랐다. 힘겹게 의자를 집어든 시환이 드라군을 향해 없는 힘을 끌어모아 최후의 저항을 해보았다. 물론, 이런 저항이 사태를 바꿔줄 수 있을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김시환으로 남고 싶었던 의지의 표현이라면 적절할 것이다.
문득 계단 밖에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만, 이미 혼미해진 시환에게는 그 어떤 것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며 다시 달려드는 드라군을 보며 시환은 의자를 휘둘렀고, 굉음과 함께 의자가 박살나며 시환은 갑작스러운 폭발에 다시 도로 튕겨져나갔다. 그리고,
"아저씨! 무사해요?!"
누군가, 그를 불렀다. 폭발의 충격으로 부서진 의자가 얼굴을 강타하며 눈에 멍이 들어버린 시환은, 다시는 들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 못한 인간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 멍든 얼굴을 보며 그를 찾아온 인간이 소리쳤다.
"이 바보 아저씨가! 어쩌자고 이런 위험한 곳을 혼자 온거에요!"
"......"
"왜... 왜 그랬어요! 평소처럼 나타나질 않고 없어진 아저씨 때문에 내가 얼마나...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알아요? 여기는 지금 우리 거점지역을 제외하면 죄다 차원종들한테 먹혀버린 상황이잖아요. 거점 여기저기를 다 샅샅이 찾아봐도 아저씨가 코빼기도 보이질 않고, 늘 있던 자리에는 노트북 옆에 무슨 쪽지 하나만 달랑 놓고 사라져있는데! 내가 아저씨 때문에 이렇게 무리하게 뛰어들거라는 생각은 안 하신거냐구요!!"
"...쿠쿠쿡... 뭐, 그 쪽지를 보고 와주신거라면... 고맙군요 요원님. 쿠흐억... 그, 그럴만한 일이 있다보니 아무래도 자리를 비울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아, 아무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차원종이 득실대는 곳에 위상력도 없는 아저씨가 혼자서 찾아오려고 했다고요? 필요하면 적어도 나한테 요청을 해볼 수는 있는 거였잖아요!"
"...이번 건 아무래도 제 실수가 크군요. 혼자 조용히 정보수집을 하려고 했던 일에 그런 조그만 쪽지 하나 처리 못 하고 나오다니, 전직 슈팅스타 팀의 리더로서 실격이에요 실격... 쿠쿡... 요원님께서 절 생각해주시는 마음은 고맙지만, 이번 일은 분명 제가 해야하는 일이었으니... 쿠훌럭... 커억... 으, 그렇다고 이해를 해주시는게 어때요?"
"아뇨, 이해 못 하겠어요. 아저씨가 이래버리시면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거에요? 아저씨야말로 다른 사람 생각은 하나도 해주질 않는 거에요? 나요! 나! 내 생각은요?! 아저씨 없으면 뭘 어떻게 하는데요 제가!"
그렇게 토해내듯이 시환을 향해 소리쳐대던 세하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시환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고 선명하지 않은 시야로, 시환은 세하가 굳어진채 축 처진 어깨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보게 되었다. 자신이 아끼던 사람이 상처입고 괴로워하는 걸 언제나처럼 두고보지 못하는 세하였다.
"요원님, 이제 괜찮으니 그만하세요. 분위기를 보아하니 더 이상의 차원종의 기척도 없는 듯하고... 아마 요원님이 오시는 길에 다 처리하셨을거라 생각은 되지만 말이죠."
"......"
"자 그럼... 쿠쿡... 요원님 덕분에 여기에 온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군요."
힘겹게 몸을 일으킨 시환이 준비해둔 저장장치를 지하실에 위치한 컴퓨터에 꽂았다. 그리고 비밀리에 조사해온 자료들을 토대로한 패스워드 몇 개를 순서대로 입력했고, 정보가 뚫렸다. 몇 번의 클릭으로 자료를 복사해모은 시환은, 마지막 정보까지 저장장치에 복사해 옮겨낸 뒤 그것을 분리해 주머니에 챙겨넣었다.
"...아저씨, 그건 뭔가요?"
"아, 이거 말씀이신가요? 특별한 건 아니에요. 그저 이번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 누구였을지에 대한 직감이 맞아떨어졌길 바랐을 뿐인데, 이거야 원 이렇게 정확하게 맞췄을 줄이야."
"...그게 무슨..."
"아마 요원님께서도 조만간 보시면 아시게 될거에요. 이 더럽고 추악한 사태의 배경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말이에요."
"......"
"아 그리고, 이 자료에 제가 기대하지 않았던... 것도 있으니 그것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겠다 싶어요. 이거 참,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였다지만 이렇게 구린내를 뒤에서 숨기고 있었다니 정말 대단하다니까요."
그러면서 몸에 묻은 먼지를 조금 털어내더니 떨어져나간 문을 지나쳐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는 계단에 발을 놓는 시환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실 때가 되신거 아닌가요? 아무리 제 걱정으로 이렇게 와주셨다고 해도, 이렇게 사적인 이유로 거점지역을 오랫동안 이탈하면 받게되실 징계도 있으시다고 알고 있는데 말이죠. 쿠쿡..."
다른 한 마디 말도 안 하고 그저 모니터와 시환만 천천히 번갈아보던 세하가, 그대로 시환에게 달려들어 안겨버렸다.
"...다시는, 나한테 말 한 마디 없이 이렇게 위험한데 혼자 다니지 마세요."
시환에 품에 얼굴을 묻은 세하가 작은 목소리로 올라오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한 마디 한 마디 힘겹게 이어갔다. 그런 세하를 내려다보던 시환이 세하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쿠쿡... 뭐,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으니까. 어짜피 그 때 이후로 제 삶은 보너스에요. 지독하리만치 처절하고 더러운 보너스였죠. 사실 난 아직도 요원님의 마음을 받아도 될지 가끔 혼란스러워요. 어짜피 난 버린 인생이고, 요원님의 미래를 방해할만한 위인도... 아니니까요."
"누가... 누가 버렸다고 그랬어요? 누가 아저씨 인생 버린 인생이라고, 처절하고 더럽다고 누가 그랬어요?"
품에서 고개를 끄집어낸 세하가 말을 이어갔다.
"전 솔직히 아직 아저씨의 마음을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아저씨가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도 얼마 전에서야 얘기를 나누면서 알게 되었잖아요. 하지만 그게 뭐가 어때서요! 지금은, 지금은 안 중요해요? 지금 내가 여기 있는데 그런건 하나도 중요한게 아니냐고요! 다른 사람이 뭐라 하던, 아니면 아저씨가 스스로 뭐라 하던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아저씨 좋다고 하는 그거면... 된거 아니에요?"
토해내듯 감정을 전하는 세하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잠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던 시환의 그림자가 세하의 눈망울을 점점 덮어갔다. 그리고, 한 번 더 그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짧았지만 어느 때보다 깊었던 그 순간을 지나며, 수없이 많은 먼지들이 뒤덮인 건물 속에 오직 두 사람만이 뜨겁게 살아있는 숨을 쉬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아, 결국 여기서도 이렇게 되는건가 싶네요. 요원님 마음 충분히 잘 알아들었으니, 그만 눈물 보이시고 이제는 진짜로 돌아가야겠네요. 다만, 아직 위상력이 제가 없으니 어느 정도 도움을 부탁드려도 되겠어요?"
"알았어요 아저씨. 저만 따라오세요. 제가 보호해서 구출해드릴테니까. 이거 예전에도 종종 했던 민간인 구출하는 작전이나 다름없는거잖아요?"
"쿠쿡... 그래요? 아 이거 참, 전직 클로저 요원이었어도 이젠 위상력이 없으니 그냥 민간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렸군요. 내 꼴이 이게 뭐람... 쿠쿡... 그럼, 잘 부탁드리죠. 이세하 요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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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M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