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너만 아파야했던건데? 내가 같이 있어줄 순 없었던거야? 왜 넌... 넌 바보같고, 멍청하고, 미련하고... 정말... 흐으흑..."
그녀가 나를 껴안은 채 울었다, 그동안의 시간을 품은 서러움을 모조리 털어내겠다고 작정한듯이. 그리고 내 마음의 한 구석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어떤 말을 해야할지, 어떤 몸짓을 해야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그 어떤 판단도 서질 않았다. 그녀가 안긴 품이 촉촉히 젖어가기 시작했다.
미련하게도 나는 그녀를 위로해줘야겠다는 생각을 단 하나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서 그녀의 눈물을 가슴팍으로 모두 받아내고만 있었다. 서럽고 힘겹게 우는 소리만이 공백을 가득 메운, 심장이 꿰뚫린 듯이 아픈 시간들이 흐르고 있었다.
항상 강했기 때문에, 늘 한결같았기 때문에 너무 쉽게, 안일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품고 있었던 수없는 시간 속의 중압감들과 따가운 시선들, 무시받고 상처받던 나날들. 그럼에도 꿋꿋이, 함께 달려왔던 팀원들을 향한 그녀의 마음. 그리고...
"너 이세하, 심각하게 부상이라도 입었다가는 복귀하기 힘들었을 게 분명한데도 그렇게 무모하게 뛰어들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했잖아! 사... 살아돌아온 것만이 다가 아냐! 중단해달라고 지시까지 했는데도... 그런 말은 무시해버리고는 혼자서 그렇게... 그렇게 힘든 곳을 헤집고 다니고... 바보... 멍청이..."
품에 안긴 슬비가 그대로 원망을 담아 내 가슴팍을 주먹으로 몇 번을 내리쳤다. 솔직히 조금 아팠지만, 그런걸 내색할 분위기가 전혀 아님은 나도 깨닫고 있었다. 지금은, 그녀의 시간이었다.
"미안해. 하지만, 누군가는 결국 해야만 했던 일이고 끝을 봤어야만 해.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아니,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 걱정 끼쳐서... 정말 미안해."
"네... 네가 죽었으면... 정말 그랬으면... 나, 난 어떻게 해야했던거야? 응? 내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던거야?"
나를 안고 서럽게 울던 그녀가 그대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눈물이 마르질 않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 한 구석의 착잡함이 더해갔다. 평소에도 무디다는 말은 정말 많이 듣고 살아왔다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멍청하게 있어야만하는 내 자신이 이토록 원망스러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사실, 내가 어떻게 해줘야할지도... 모르겠기 때문에.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 내 왼손을 얹었다. 오른손은 그녀의 분홍빛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줬다. 그리고 나를 낮춰 그녀의 이마 근처에 더 가까이 나의 얼굴을 가져다댔다. 마음 속으로 백번이고 실례한다는 말을 되뇌이면서,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어색하게 떨리는 감각으로 그녀의 이마를 살짝 건드리고 입술이 자리를 떠나자, 슬비의 눈물이 조금은 잦아드는 것 같은 다행스러운 분위기였다.
슬비가 나를 올려다봤다. 부은 눈가에는 아직 새벽 이슬같이 반짝이는, 안도와 기쁨의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가왔다. 나에게 어떤 감정이 찾아온걸까.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걸까. 내 눈 앞 시야가 그녀만으로 가득차버리는 찰나의 짧은 순간에, 나에게 있어서 그녀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만 했다.
입술이 부딛쳤다. 젖은 입술 속에 슬픔과 기쁨이 모두 녹아있었다. 나도 조금은... 마음을 놓아도 되는걸까? 나같은 놈이 그녀에게 사랑을 받아도 되는 것인가? 딱히 성실해본 적도 없었던데다가, 좋아하는 것은 게임 뿐이었고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어주거나 감정을 드러내보인 적이 없었다. 그저 흐르는 시간에 맞춰 싸웠고, 다쳤고, 지켜냈고, 놀았고, 잠들고 깨기를 반복했던 삶이었다.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거쳐야했던 수많은 아픔들을 품에 끌어안은채 하루하루 힘겨운 짐과 사투를 벌이는 그녀와는 다른 입장이었던 것이다.
"왜...? 무슨 말이라도... 해줄 수는 없는거야 지금? 너한테 나는 그냥... 동료 그것 이상으로는 아직 안 되는거였던거야?"
동료... 그 이상이라는 말인가? 과연 내게 그럴 자격이 있었던가라는 생각이 몰아치고 있었다. 알파퀸의 아들이라는 것 하나로, 잠재력이 뛰어나다는 그것 하나로 이세하의 검은양팀 이야기는 시작됐지만, 그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이세하라는 남자가 과연 이슬비의 옆에서 충분히 어울리는, 함께 하는데 부족함이 없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그리고 그 결론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낙제점.'
"슬비야. 난... 난... 아직 부족한 것 같아. 너한테 항상 불편함만 끼친 걸림돌이었잖아. 미안해. 너한테 충분히 좋은 동료가 되어주지 못한 것 같아서..."
"이세하, 다른 어느 누가 그런 얘기를 하고 그런 생각을 하던 그건 상관 없어. 내가 널... 좋아하겠다는데 그게 무슨 상관인거야 도대체?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걱정하고 울고 안기는건데? 응? 왜? 왜겠냐는거야...!!"
슬비가 다시 나의 품에 안겨들었다. 내 머릿속에 박혀있던 감정의 빙벽이 녹아내렸다. 그녀의 한 마디가 이세하라는 남자의 감정적 한계를 뛰어넘었다. 내 품에 안긴 그녀를 다시 내려다봤다. 벽을 깨고 나온 나의 눈에 들어온 그녀의 모습을 보던 내 입에서 나온 첫 마디.
"예뻐."
"...?"
"네가... 너무 예뻐. 너무 좋아. 너무 사랑스러워 미치겠어."
"무... 무슨 소리야?"
"스... 슬비야. 미안해. 하지만 진심이야. 네가 너무 좋은데... 왜 지금까지... 말을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어...."
"......갑자기 무슨..."
"느... 늦었어? 늦은거야?"
품에 얼굴을 파묻고 표정을 감추던 슬비가, 무언가 작심한듯이 세하의 옷깃을 한 번 세게 붙잡고 내 눈을 마주봤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물을 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녀가 날 올려다봐주고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대로 슬비의 입술을 다시 가져갔다. 그리고 슬비도, 조용히 그 움직임에 동참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나와 그녀가 서로의 입술을 나중을 위해 남기기로 했다. 그리고 함께 웃었다. 폭소하듯 웃는 것은 아니었으나, 은은한 미소와 잔잔한 눈웃음, 그녀가 가진 귀엽고 사랑스러운 표정을 내 눈에, 내 머릿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리고 나와 슬비는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품에 안고 바라보다 입술을 맞대기를 반복했다. 거추장스러운 수식어는 필요가 없었다. 그녀와 나, 그 순간만큼은 둘 만의 세상이었다.
앞으로 절대 그녀를 다시 울리는 일이 없겠다는 혼자만의 다짐을 했다. 입 밖으로 내어 그녀에게 들려준다고 해도, 그녀는 어짜피 웃어넘겨버릴 것이 분명했다. 클로저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차원종들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원치않는 희생을 경험했어야만 했고, 그것은 비단 그녀 주변 뿐만아니라, 그녀 자신에게도 닥쳤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더 차원종에 대한 복수심으로 차있었지만, 그만큼 더 깊고 아픈 상처를 지고 살아야만 하는 그녀였기 때문에.
"이세하, 지금 무슨 생각해?"
"아, 아니 별거 아냐."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함께 근처 대공원을 찾았다. 차원종의 소란으로 한동안 폐쇄되고 방치되었다가, 최근 다시 복구되어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는 대공원. 그리고 그 공원 속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는 나와 그녀. 벤치에 앉아서 게임을 하려다말고, 문득 그 혼자만의 다짐을 돌이켜 곱씹었다. 그리고는, 그래도 얼마간은 이 다짐,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너 또, 무슨 웃긴 생각이라도 하는거야? 또 너 그 게임 관련된 거 생각하고 있는거야?"
"아 아냐, 정말 아니라니까? 내가 무슨 24시간 365일 내내 게임만 생각하고 살거라고 생각하는거야?"
"응."
"......아니야. 아니라고. 나도 다른 생각 가끔 하고 산단 말이야!"
애써 부인하면서 머리를 긁적이고는 시선을 돌려 하늘을 봤다. 귀여운 참새 몇 마리가 도시 속 공원의 나무 사이로 요란스러운 짹짹거림과 함께 서로 어울려 놀고 있었고, 그 뒤에 펼쳐진 평화로운 하늘이 눈부셨다.
눈부신, 나날들의 시작이 나를 설레게 만들고 있었다. 바보같이 행복한 시간들이, 그저 좋아져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이 말을 남긴 채 세하에게서 돌아서야만 했다. 애초에 그의 삶 속에 뒤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미련이라는 것, 너무나 하찮은 사치였다. 당장의 삶마저 나락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꼴에, 무슨 여유가 있어서 자신을 돌아본다는 말인가.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돌아선 나타의 모습에는 일말의 아쉬움도 남아있지 않았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한 세하의 표정을 등 뒤로 쳐내버린 채, 나타는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갔다.
다신 마주치지 않겠다는, 분노 섞인 의지를 품은 채로.
며칠이나 지났을까 싶은 날, 파괴된 신서울의 복구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따금 어디쯤엔가 불쑥불쑥 나타나는 차원종들이 아직도 굉장히 검은양팀을 골치 아프게 만들곤 했다. 그리고, 그건 벌처스 소속 처리부대, 늑대개팀도 예외는 없었다. 특히나 이번 일련의 중대한 사건을 일으킨 벌처스의 수뇌부에게 매우 엄중한 파면 및 징계, 수사가 진행되기 시작했고, 그 영향은 처리부대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피를 갈구하는 차원종의 군세가 달려든다. 이미 박살날 대로 박살난 놈들이지만 끊임이 없다. 그만큼 나타도 더욱 더 광기를 드러내며 차원종을 상대로 한 피의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구속구가 잠자고 있는 지금의 순간만큼은, 그가 가진 모든 힘을 다 드러내 차원종들을 상대할 수가 있었다.
"개같은 차원종 자식들 다 죽어!! 죽어버려!! 크아아아하하하앗!"
분노를 넘어선 광기에 썰려나가는 차원종들. 나타가 지나가는 자리에 남겨진 것은 잔인하게 찢겨져나간 차원종들의 흔적 뿐이었다. 수많은 훈련과 전투로 단련된 나타의 온전한 능력을 일개 차원종 조무래기가 감당할 수 있을리는 당연히 없었다.
"헉... 헉... 헉... 이 자식들 다 끝인가?"
차원종을 도륙한 칼날의 피가 마를새도 없이, 나타는 황급히 다음 구역으로 뛰어올랐다. 이 지긋지긋한 차원종놈들을 한시라도 빨리 제거해야 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라도 더더욱 있는 힘껏 성질을 드러내며 과격하게 싸워나가야만 했다. 불타버리고 무너져내린 건물들 사이로 피어나던 연약한 꽃들이 짓밟혀가는 건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괴성과 굉음을 내며 격투를 거듭하던 끝에, 슬슬 끝이 보여갈 참이었다.
"쿠워어우!! 쿠워어어어!!"
이 일대에서 종종 난동을 부리는 트룹 맹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위압감 있는 덩치에 걸맞는 파괴력을 지닌 놈이긴 했지만, 위상변곡률이 점차 안정화되어가는 요즘같은 시기에는 그 위력이 예전만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락한 위력을 반증하듯이, 움직임이 둔해진 것이 눈에 띄었다.
"합!! 이 짜증나는 자식!! 죽여버리겠어!!"
맹장과의 몇 번에 걸친 합이 있은 후에, 나타는 피 묻은 쿠크리를 있는 힘껏 들어올렸다.
"크흐흐아아아아압!!"
위상력을 한계치까지 폭주시킨 나타의 고함소리와 함께 쿠크리가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그리고 그 순간, 막대한 위상력 폭풍이 휘몰아치면서 거대한 몸뚱이의 맹장을 붕 띄워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내리꽂힌 쿠크리에 잠재된 위상력의 파동이 나타가 있는 일대를 요동치게 만들면서, 찢긴 맹장의 몸체가 휘말려 산산히 흩어졌다. 차원종의 흩뿌려진 피가 온 사방에 퍼져나가버리고, 근처에서는 쇳덩이가 쉬익하면서 녹아내리는 소리도 들렸다. 다만 나타는 위상능력자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을 뿐이다.
"헉... 허억... 헉..."
이유는 모르겠지만 평소답지 않게 너무 에너지를 많이 낭비했다. 무언가 평소에 느끼던 감정을 뛰어넘은 것이 자신을 지배했음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구속구가 강렬하게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과도한 흥분상태에 빠진 자신을 진정시키려는 동작임이 틀림없었다. 물론 흥분상태를 가라앉히는 것은 좋은 현상이긴 했으나, 매우 높은 확률로 이 상황에서는 그대로 쓰러져버리기 일쑤였다. 오늘도 역시나 그렇듯 조금씩 힘이 빠지며 맥이 풀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오는 듯했다. 슬슬 그렇게 잠시 쉬어야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때쯤,
"음? 이건 또 누구야? 난 여기에 불청객이 온다는 얘기는 못 들은 것 같은데?"
순간 강한 위상력 파동이 나타의 감각에 닿았다. 남아있던 차원종 떨거지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강한 위상력이다. 게다가 이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다. 물론 그게 누구건간에 나타는 신경쓴 적은 없었다. 적어도 자신에게 이들이 관심을 보인 적은 단 한 순간도 없긴 했다. 이들이 탐내는 목적은 늘 검은양이었다. 자신에겐 어떤 인기척도 드러낸 적이 없었던 자들이다. 이제와서야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결론이 닿을즈음,
"음... 쓸모없을 정도로 약한걸? 이래가지고서야 노는데 재미도 없잖아... 그냥 콱 짓눌러버리는 게 좋을까?"
"크흐읍... 짜증나는 소리 좀 그만 해!"
"훗, 그래도 어떻게든 힘을 내보고 싶은 모양새이긴 한데... 흐음, 그래도 역시 재미는 없어. 그냥 없애버릴래."
순간 먼지처럼 다가오는 바람이 나타를 휘몰아치듯 감싸서 들어올렸다. 몸을 강하게 조여오는 압박에 약간 몽롱해져가던 나타의 정신이 번쩍하고 돌아왔다. 구속구의 억제도 생존을 위한 의지를 꺾을 수는 없다는 듯이 나타는 있는 힘을 짜내어 강렬하게 저항했다.
"크으악... 너... 너 이 짜...짜증나는 자식!! 크아아악!!"
"...그만 둬 더스트!"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소년의 다급한 목소리에 더스트의 압박이 조금 느슨해졌다. 숨막히고 터져버릴 듯한 고통에 괴로워하던 나타도 잠시 약해진 속박과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놀라 힙겹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야 왔네. 이세하 군. 오늘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날 맞이해줄거야?"
"뭐야. 오늘은 또 뭐 때문에 이렇게 나타난거야?"
"아, 괜찮아. 진정해도 좋아. 어짜피 오늘은 꽤나 오랜만에 너를 느껴보고 싶은 마음에 분신으로 이렇게 찾아왔으니깐 말야. 네 안, 굉장히 멋지고 매력적이라니깐? 하아... 역시... 갖고 싶어 미치겠는걸?"
"헛소리 그만 두고!"
철컥.
"빨리 여기서 사라져!"
찬란한 광채를 모은 이세하의 건블레이드가 푸른 불빛을 뿜으며 그대로 더스트의 분신으로 돌진해들어갔다.
"하음... 조금만 더 놀고 싶었는데... 아깝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분신은 세하가 귀엽다는 듯한 말과 함께 까딱까딱하는 손짓을 하더니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라 도망쳤다. 도망친 바로 그 자리에, 세하의 유성검이 꽂혔다. 세하의 위상력이 충돌한 자리에는 위상력을 품은 찬란한 푸른빛의 흔적들이 흩어져있었다. 소모한 탄피를 재빨리 절도있는 동작으로 튕겨낸 세하는, 그대로 속박에서 풀려난 나타에게 달려갔다. 이젠 구속구의 억제가 없어진지 오래였지만, 더스트의 공격을 지친 맨몸으로 그대로 받아내야만 했던 나타는 힘이 다 빠져버린 듯 가쁜 숨만 쉬고 있었다. 세하가 다가오는 것을 보던 나타는 그 특유의 비웃는 듯한 웃음을 세하에게 지어보이며, 죽은 맹장의 흔적 곁으로 다가가 마지막 쿠크리를 꽂아넣고는 그대로 풀썩 쓰러져버렸다. 시야마저 사라질 즈음 느낀 마지막 감각은, 힘차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거칠은 숨소리가 전부였다.
위상능력자답게 회복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쓰러진지 얼마되지 않아 서서히 정신이 든 나타가 눈을 떠 본 것은 야전침대 위에 누워있는 자신과, 유니온 마크가 박혀있는 천막의 내부였다. 잠시 몸을 일으켜세우려다 머리에 어지러움을 느낀 나타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시 침대에 누운 채 이마에 팔뚝을 갖다대는 순간, 밖에서 몇 마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세하, 우리가 나설 필요까지는 없었어. 나타에 대한 것은 벌처스가 관리하는 사항이란 말야."
"아, 알아. 안다고. 그런다고 폐허가 다 된 곳에 쟤 혼자 덩그러니 쓰러져 있는거 썩 보기 안 좋았단말야."
"그래, 슬비야. 아무리 우리랑 서로 적이었었더라도 지금은 어짜피 같이 복구작업하는 동료...같은 거잖아. 한 번쯤 우리가 도와주면 쟤들도 나중에 우리 어려울 때 한 번 도와주고! 괜찮은 거 같은데?"
"...이건 우리만의 문제가 아냐. 벌처스에서도 나타가 사라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떻게 생각하겠어? 세하가 다행히 나타를 데리고 빨리 돌아와줘서 다행인거야. 안 그랬으면 한바탕 또 엮여서 소동이었을게 뻔했다고. 게다가 그곳은 오늘 세하가 출동해서 구역을 정리하기로 했었던 곳이잖아! 참, 근데 너는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온거야? 차원종들은?"
"아, 출동해서 확인을 해봤는데, 이미 다 처리가 돼있던데? 그래서 구역에 차원종이 남아있나 확인하려고 돌아다니다보니까 쟤가 저렇게 쓰러져 있더라고. 아무래도 나타 근처 흔적을 봐서는 나타가 다 처리를 해버렸던 모양인데...?"
"...뭐? 늑대개에서 관리하는 구역은 우리가 관리하는 구역하고는 다를...텐데...?"
"나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어. 일단 그건 나타가 괜찮아지고 나면 천천히 얘기해보면 될 것 같은데."
"...일단 알겠어. 앞으로 세하도 너무 돌발적인 행동은 자제할 수 있도록 해줘. 일단 다녀왔으니 한 숨 쉬고 있어."
드러누워서 대략의 대화를 들은 나타는, 대화가 끊기자 그냥 눈을 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쓸데없이 그 때 일을 숨겨나 주고는, 자기를 구해내서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이세하 이 버러지 자식은...
"짜증나."
그 때, 천막을 젖히고 이세하가 들어왔다.
"나타, 몸은 좀 괜찮은거야?"
"......"
"괜찮냐고 묻잖아."
"...짜증나게 하지 말고 가라 버러지, 없애버리기 전에."
"푸흡... 야 넌 이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냐?"
"......"
"너 거기 있던 차원종들은 왜 다 없앤거야? 어짜피 너희 구역도 아니었잖아."
"...그저 그 때 지나가다 보이던 차원종 녀석들이 짜증났을 뿐이다. 그게 다야 버러지."
"음... 그래 뭐 그렇다치지만, 설마 너는 내가 지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줄거라고 생각한...거야...? 그런거냐?"
"...빨리 내 눈 앞에서 사라지는게 좋을거야. 안 그러면 내가 너한테 무슨... 읍?"
말을 잇던 나타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세하가 그의 지친 몸뚱어리를 일으키고는 그대로 끌어안아버린 것이다. 1초가 1분처럼, 1분이 1시간처럼 흐르는 시간이 두 사람의 사이에 펼쳐졌다.
"너... 이 자식... 더스트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 갔던 녀석이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거냐? 그 놈의 허세는 좀! 어디다가 잠깐만이라도 버려두면... 안 되는거냐?"
"그... 그게 무슨... 이 버러지 자식이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내가... 언제 널 멀리했다고... 그래... 꺼으억... 히끅..."
"......"
"너... 너는 그 때 뒤로 돌아섰지만, 난 그... 그대로 있었다고!"
자신을 끌어안고 울먹히며 얘기하는 세하를 가만히 보다가, 문득 짜증이 치밀어버린 나타가 세하를 밀치고는 세하의 배에 있는 힘껏 주먹을 갈겨버렸다.
"꺼허엌... 꺼흐엌... 어억... 야... 나타."
"짜증나니까 그만 울먹거려! 계속 이딴 식으로 짜증나게 하면 진짜로 이 자리에서 사라지게 만들어버리는 수가 있을테니까!"
"푸흣... 푸하아하악... 아악... 갑자기 배를 때리는 게 어딨냐! 푸하하핫..."
갑작스러운 배빵에 당황한 채 눈물을 삼키며 웃고 있는 세하를 보던 나타가 그 특유의 비웃는듯한 웃음을 피식 지어올리더니, 쿠크리를 챙겨들고 일어나 천막 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세하도 남아있던 조금의 눈물을 털어낸 채 나타를 따라 천막 밖으로 나섰다. 따라나온 세하를 보던 나타가 세하에게 주먹을 들어올려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세하의 모습이 약간 멍하자, 나타는 그대로 주먹으로 세하의 이마를 톡하고 밀어내버렸다. 그러자 다시 웃음이 터지면서 정신을 차린 세하가 나타의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맞대었다.
"버러지 자식..."
그렇게 힐긋 웃음을 지어보인 나타가 검은양팀 재해복구본부를 떠나 뛰어올랐다. 멀어져가는 나타의 뒷모습을 보던 세하의 얼굴에도 씁쓸하지만 밝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역시나 나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이 분명 서로는 미소를 짓고 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