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잊었나요
잊지 말아달라고
지금 내가 외치고 있어요
한순간 다가왔던 바람은, 떠나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약간이라도 더 어렸던 몇 년 전 그 시기의 나이라면 누구나 흔히 겪을 수 있는, 그러나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라고 세하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도 세상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처음 클로저를 시작하기로 했던 그때의 미숙하고 아직은 철부지 같던 모습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 어린 시절마냥 무작정 시키는 대로 모든 걸 호기롭게 달려들기만 하던 나이는 이미 지나버렸다. 어느 날에서부터 인가 그들에게는 그들의 지위에 맞는 임무가 주어지는 나날들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런 대우에 익숙해졌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아무것도 모르고 달려들던 그 시절보다 겁이 더 많아졌다...라는 표현이 더욱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그 날을 정의하자면, 세하에게는 일생일대를 가로지른 중대한 실수가 있었던 날이다.
여느 날처럼 임무를 마치고 본부로 돌아오던 열여덟의 평소와 다름없던 세하가 있었다. 언제나처럼 밝은 모습으로 임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미스틸테인도 그 옆에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면서 딱 적당한 햇빛이 있었던 포근한 날씨. 누구나 좋아할 그럴 날씨가 펼쳐진 하루였다.
"세하 형! 오늘 괜찮으셨어요? 아까 보니까 많이 피곤해보이시던걸요?"
"아, 으... 그게 오늘 생각보다 피곤하긴 했지..."
"무슨 일 있으셨어요? 밤에 힘든 일이라도 하신게 있으신거에요?"
"아, 아냐 그런거. 넌 몰라도 돼."
"...우웅? 전 몰라도 되는 일이라구요? 그게 무슨 일인데요?"
"아니라니까! 몰라도 돼. 네가 그렇게 안 물어봐도 돼!"
"아니라니까! 몰라도 돼. 네가 그렇게 안 물어봐도 돼!"
"진짜요? 우...으아... 너무 궁금한데..."
흔한 일상이었다. 팀의 막내이자 귀여움을 담당했던 미스틸테인. 어린 나이 덕분인지 호기심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강했고, 덕분에 팀원들이 자주 곤란에 처하기도 했다. 제이도, 유리도, 슬비도 모두들 한 번쯤 아무것도 모를 듯이 웬만한 건 다 아는 이 소년에게 당해본 기억이 있을 정도니 말 다 한 거나 다름없다.
자주 모두를 당황시키는 이야기들을 하곤 하지만, 미스틸테인은 기본적으로 어리고 귀엽고 재밌는 동생이다. 그래서인지 가끔씩은 세하도 테인이를 꼭 껴안아주고 사랑해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들곤 했다. 소중한 동생이고, 그래서 더더욱 차원종과 싸우는 전선에 서있는 미스틸테인과 함께라면 평소보다 조금은 더 열심히 뛰었는지도 모른다. 함께 싸우는 팀원이자, 다치지 않게 해주고 싶은 막내... 이기도 하니까.
"......"
"...우읍...? 세하형 뭐해요...?"
"......?? 어어? 에에엨?!"
잠시 감상에 잠겨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채 있던 세하가 테인의 말에 순간 놀라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잠시 전 보았던 당황스러운 미스틸의 표정과 함께 자신이 접촉하고 있던 감각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맙소사... 내가 무슨 짓을... 내가 미스틸한테 무슨 짓을 한거지...?'
"세하 형, 이거 뭐에요?"
"으...어? 어...? 아 아니, 잠깐만 그러니까 그게..."
"우웅? 여기서도 이런 인사법이 따로 있어요?"
"아... 그... 그러니까! 그, 그래. 그냥 인사야!! 으응 그럼!..."
"우웅... 세하 형 오늘 조금 이상하긴 한데... 알겠어요! 빨리 가요 늦겠어요 우리."
"어, 그래. 가야지. 알았어 빨리 가자 테인아."
약간 놀란 표정이 스쳤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밝게 앞서 뛰어가는 테인이를 보면서 세하는 멀찍이 쓴웃음을 삼켜야만 했다. '도대체 왜 그랬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누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마따나 미스틸테인도 세하에게는 소중한 동생이기도 했다. 그저 소중한건데... 아껴주고 보살펴주고 싶은 것 뿐인데...
'과연, 그게 진짜 네 진심일까?'
가슴 속을 찌르고 들어가는 진심이 세하를 공격했다.
'네 속에 잠가놓은 감정을 애써 무시하려고 하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라고 세하는 생각했다. 그런 감정 따위 내가 미스틸에게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 단 한 순간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다.
'정말인가? 너의 가슴에 손을 얹고 그렇게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가?'
세하는 더 이상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미스틸을 따라 뛰어가기 시작했다. 마음과의 마지막 대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채로. 모든 진심을 다시 땅 속에 파뭍어버린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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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이 또래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흐른 셈이다, 5년이라는 시간은. 미스틸은 그때의 내 나이가 되어 키가 훌쩍 커버렸고, 나와 나머지 멤버들은 여전히 검은양이라는 이름 아래 활동을 해나가고 있었다. 다만, 제이 아저씨는 예의 나쁜 건강 상태가 더욱더 심각하게 악화되기 전에 서서히 클로저로서의 두 번째 인생을 정리하고 있던 참이다. 그럴 만도 하지. 꽤 긴 시간 동안 모든 게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채 싸워온 대가, 원치 않은 실험의 고통을 견뎌낸 대가는 이런 대우밖에 안 되는 것이 또 현실이었으니.
각설하고, 오늘의 이 외출은 미스틸테인이 나를 불러낸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귀엽기만 하던 어린 꼬마 아이 미스틸테인은, 어느새 훌쩍 커버려 내가 올려다봐야 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아직은 막내티를 벗지 못했지만 나이가 조금씩 들기 시작하면서 약간의 진중함도 갖추기 시작하는, 뭇 여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을만한 아름다운 남자로 성장해가고 있다고 하면 적절한 표현일까...
"구텐 탁... 어떤 걸로?"
"녹차 프라푸치노에 캐러멜 시럽, 휘핑크림"
"네 알겠어요. 여기, 화이트 초콜릿 모카에 녹차 프라푸치노, 캐러멜 시럽, 휘핑크림 얹어주시고요. 네."
평소에는 밝은 모습뿐이던 미스틸테인의 표정이 오늘따라 썩 진지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미스틸테인에게 무언가 말 못할만한 고민이나 걱정이 있어 보이는 눈치였다. 그러기에 그래도 꽤나 오래 함께 했던, 그리고 팀원 중 가장 가까운 남자인 나를 불러냈겠지.
잠시 기다린 뒤 커피를 받아들고 3층으로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미스틸테인은 구석으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3층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창가나 중앙이 아닌, 구석자리를 선택한 이유는, 아무래도 내 짐작대로 무언가 중요한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것이거나... 아니면...
"세하 형. 요즘 어때요?"
"뭐, 늘 그렇듯이 같이 작전 돌아다니고 있잖아? 특별한거 없어. 요즘 또 새로운 대작 게임이 나올거라고 난리법석이긴 하길래 관심을 두고 있는 건 있지만. 그것 말고는 특별한건."
"그렇군요..."
"뭐 내 얘기는 내 얘기고, 오늘 같은 날에 난 왜 불렀어?"
"그냥... 얘기를 좀 할 게 있어서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모카 한 모금을 조용히 들이키는 미스틸. 세하는 미스틸의 다음 말을 차분히 기다렸다.
"형이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뭐가?"
"...사실 전 그 때 이후로 가끔씩 확신없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형이 그걸 잊어버리셨으면 모르겠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잠시 생각이 나지 않는 듯하다가, 떠올랐다. 지금 이 아이가 하고 있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뭘 얘기하는거야? 뭘 잊어버렸다는건데?"
되도록, 티를 내지 않기로 했다. 그 때 일은... 순간의 사고로 묻어버리기로 다짐했으니까.
"...그런건가요."
"......"
"그게 그렇게 가벼운 일이었군요, 형에겐."
다시 모카 한 모금을 들이켜는 미스틸. 생각해보니 난 미스틸이 그 얘기를 시작한 뒤로 단 한 모금의 프라푸치노도 마시지 못 했다. 게임기를 만지작거리는 모습도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다. 티 내지 않으려 했으나 커피를 한 모금 간신히 들이키는 모습이 왠지 부자연스러웠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잠시만..."
커피를 마시던 내 모습을 보던 미스틸이 일어섰다. 그 잠깐동안 나를 애절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고, 미스틸이 다가왔다. 순간 스쳐가는 그 때의 기억이 내 머릿속을 아찔할 정도로 사로잡았다. 점점 시야가 어두워졌고, 깊고 어두운, 그러나 분명한 감정을 품은 미스틸의 눈동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촉촉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당황해 치워낼 생각조차 못 한 내 입가의 휘핑크림을 자연스럽게 덮어쓰듯 미스틸의 입술이 다가왔다. 이 촉촉함이 그저 휘핑크림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미스틸의 젖어든 입술 때문이었는지를 분간할 여유조차 없었다.
생각 외였다. 이 아이는 그 때와 다를바 없는 순수함이 묻어있었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모든 생각들이 어지럽혀지면서 빨려나가버리는 느낌이었다. 생각지 못했기에 아찔했지만, 그로 인해 더욱 미스틸의 감정이 전해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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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같이 길게 느껴진 짧은 순간이 지나고, 문득 정신을 차린 세하는 도로 제자리에 앉은 미스틸을, 그리고 이제는 거의 다 커가는 소년의 눈망울을 보았다. 붉어지는 눈시울을 바라봐야 했다.
"그 때의 일을... 그렇게 가볍게 잊어버렸을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어요."
"너..."
"그 때, 세하 형이 남겨준 걸 잊지 않고 있었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제 말은 이게 다에요."
"......"
테이블을 두고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서로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줘야할지 떠오르지 않는지 그저 멍하니 서로를 바라봐야만 했다. 그리고, 세하가 일어섰다. 5년 전의 그 날이, 그리고 그 속에서 그를 향해 말하던 마음의 목소리가 무엇인지를 그는 드디어 깨달았다. 미스틸테인을 바라보던, 그리고 입맞춰주었던 그 때의 그 감정을,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난 건 아닌지 하는 마음과 함께 세하는 받아주기로 했다. 자리에 앉은 미스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 때 그 날의 모습처럼, 세하는 미스틸에게 입맞춰주었다. 미스틸의 눈에서, 가냘프게 맺혀있던 눈물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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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M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