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살짝 구름이 껴서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는, 시원하고 아름다운 날씨. 귀여운 새들이 정답게 지저귀는 전깃줄 아래 도롯가를 따라 한 소년소녀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이세하, 넌 그걸 아직도 붙잡고 있어야 하는거야?"
"아아, 미안 잠깐만. 이것만은 꼭 깨야할 것 같거든."
"너 벌써 그 말만 몇 번째인지 알기나 해? 작전 중이 아닌걸 다행으로 여겨."
또 똑같은 일상의 다툼이다. 어찌된 이유인지 둘만이 만난 자리가 됐지만, 사실 그런 것에 이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나이스! 오케이! 됐어. 됐다고!"
"뭐가 됐다는거야?"
"이게 그... 그러니까! 굉장히 어려운건데 내가 해냈다는거야!"
"뭐, 그래. 수고했어. 그러니까 이제 그 게임기 좀 그만 들여다볼 수는 없는거야? 지나가던 사람들하고 부딛칠 뻔한게 몇 번이나 있었는지 알아?"
"아 알아 안다고, 네가 한 네 번인가 날 끌어당겨줬잖아. 근데 너무 옷깃으로만 끌어당겨서 내가 결국 그 중 한 명하고는 부딛쳤고."
"...넌 또 그걸 왜 다 세고 있는거야?!"
"끌어당겨주려면 좀 확실히 해달라고. 내가 원래 뭔가에 집중할 때는 앞뒤 안 가리는거 알잖아."
"너 정말... 나도 어쩔 수 없구나 진짜."
그렇게 길을 걷다가 만난 작은 공원. 적당히 아기자기한 꽃과 나무들이 펼쳐진 향기로운 느낌이 가득한 곳에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슬비, 더운데 잠깐 쉬다 가면 안 될까?"
"덥다면서, 그럼 빨리 갈 길 가는게 더 낫지."
"아니 저기, 그늘이 있어. 잠깐 그늘에서 쉬자. 저기 벤치 옆에 자판기도 있어."
"음... 그래. 그러자."
그렇게 벤치로 다가가 앉으니, 그 전까지 햇빛 아래에서는 덥기만 하던 바람이 다소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잠시 앉아서 바람을 느끼던 세하가, 같이 앉아있던 슬비의 팔을 붙잡고 갑자기 확 일으켜세운다.
"뭐, 뭐야?"
"여기 자판기에서 뭐 좀 뽑아서 먹자."
"그런건 말로 해도 되잖아! 왜 갑자기 놀라게 잡아당기는거야?"
"내가 아까 말했잖아. 끌어당겨주려면 확실히 해달라고. 내가 한 번 직접 보여준거야."
"뭐? 그게 무슨..."
"뭐 마실거야? 난 콜라가 괜찮겠는걸."
"아, 음... 난 커피로 할게."
"그럼... 음... (쿠당탕, 쿠당탕) 자 여기."
커피를 받아든 슬비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벤치로 돌아가 앉았다. 캔을 따는 소리 외에는,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커피를 홀짝이던 슬비가 시계를 보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세하를 확 잡아올렸다. 그 덕분에 마시던 콜라를 바지에 확 쏟은 세하는 당황섞인 짜증으로 슬비에게 말했다.
"아잇, 야 이슬비. 갑자기 잡아당기면 어떡해? 이 아까운 걸 쏟았잖아! 내 바지!"
"뭐가? 난 네가 직접 보여준대로 해줬을 뿐이야."
"...뭐?"
"확실하게 끌어당겨달라면서? 그대로 해줬어. 그 뿐이야."
"...너...?"
"뭐해, 그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빨리 본부로 돌아가야할 시간이야. 서둘러."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찝찝하고 보기 나쁜걸 그냥 내버리고 간다고?"
"그럼, 여기서 그걸 어떻게 하려고 하는 셈이야?"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러면 빨리 가자. 늦겠어."
"후... 알았다고..."
"가서 갈아입어. 미안하니 내가 빨아줄게 그건."
한숨을 쉰 세하가 약간 어기적대는 걸음으로 슬비의 뒤를 쫓았다.
"이슬비. 너 그러면... 내가 방금 했던 다른 말도 기억해?"
"응? 뭐 집중한다 그런 말 말야? 뭐 게임에 대해서는 맞는 말이니까 그냥 그렇다 하고 넘어갔잖아."
"...그것까지밖에 안 생각한거야?"
"그럼 또 뭐가 있는... 읍!?"
말을 마친 세하가 슬비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슬비를 붙잡고 뒤로 홱 돌렸다. 그리고, 슬비의 작고 귀여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닥쳤다. 짧았지만, 그의 품고 있던 진심을 건넨 순간이 영원처럼 흘렀다.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내가 말했었던거 기억한다고 했잖아. 집중할 때는 앞뒤 안 가린다고. 난 아무래도 선택을 해야했던 것 같아서 말이야. 앞 안 가리고 너한테 왔어. 이제 네 맘대로 해. 이 뒷일의 책임도... 내거니까."
슬비에게 입맞춤을 하고는 돌아올 후폭풍을 각오하며 눈을 질끈 감은 세하. 배를 감싸쥐어야할지, 달아오른 뺨을 감싸쥐게 될지, 발목이나 정강이를 채여서 방방 뛰어야할지 순간적인 고뇌에 깊이 잠기던 사이, 그가 예상치 못한 곳에 따뜻한 감각이 접촉해왔다.
"...음?"
눈을 뜬 세하는, 엷은 미소와 함께 자신에게 매우 가까이 접근해있는 슬비의 감은 눈을 맞딱뜨렸다. 감각은, 그의 입술에 있었다. 화들짝 놀란 세하가 뒤로 물러서자 슬비가 잠깐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세하에게는.
"(얼굴이 벌게지며)뭐, 뭐야! 얘는 무슨 소릴 하는거야 진짜. 우리 빨리 가야해. 너 때문에 늦게 생겼다고."
"알아, 내가 책임진다고 했잖아."
"네가 이건 어떻게 책임을 질건데?"
"...아... 잠깐 게임기라도 압수당하면 되는... 건가..."
"너, 그런 말 하면서 손은 벌벌 떨고 있는거 다 보이거든?"
"아앗... 들켰나? 하하하..."
"뛰어가자. 늦었어."
"아 잠깐만! 나 바지 좀 생각해줘어!"
앞서 뛰어가는 슬비를 쫓아서 세하가 어기적대는 자세로 있는 힘껏 뛰어 따라갔다. 그리고, 뛰어가던 슬비의 손을 세하가 꽉 잡았다. 미소가 번지는 얼굴에 세상 처음 만나는 따뜻한 행복이 스며있었다. 구름이 맑게 개는, 이제는 따뜻함만을 전해주는 햇살이 머리 위에 비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