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밤, 평소와 다름없이 게임을 하던 세하의 곁으로 누군가 살며시 찾아왔다.
- 어이 버러지 같은 놈, 오늘에서야 제대로 만나는 것 같은데
- ...? 뭐, 뭐야? 네가 왜 여기에 있는거야?
- 지난 번에 내지 못한 승부를 내기 위해서다. 간다!
- 아 이 자식! 왜 갑자기 멀쩡히 있던 사람을 건드려!
나타의 기습에 당황한 세하는 황급히 건블레이드를 꺼내들어 방어하려 했지만, 어쩐지 그 때와 다르게 압도적으로 힘에서 밀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필시...
= 뭐야... 위, 위상력이... 안 나와?
세하의 위상력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일시에 위상력이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김기태 아저씨는 그래도 징후는 느끼면서 위상력을 잃어버렸다며! 이렇게 긴급한 상황에 갑자기 위상력이 나오지 않는 건 무슨 이유지? 도대체 왜?!
- 받아랏!
- 크아악!
혼란스러운 세하의 틈을 노린 나타의 일격에 세하가 방 구석으로 나뒹군다. 넓은 방이 아니라 피할 구석은 더더욱 없다. 자세히 보니 급작스럽게 꺼내들어 방어에 사용한 건블레이드는 나타의 위상력에 파괴당한 모양이다. 더 이상 피할 구석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세하는 마지막을 직감했다. 그래도 짧은 생애를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나타에게 달려들어 최후의 주먹이라도 갈기려는 그 순간,
- (푸욱)
......
- 허헉... 허억... 허억...
너무나 갑작스럽고 생생한 꿈이었다. 흐르는 이마의 땀을 훔친 채 세하는 게임기의 시계를 보았다. A. M. 03:45. 찬란한 별빛이 유성검 쏘듯이 방구석을 비추는 시간이었다.
- 도대체... 무슨... 꿈인거지... 허억... 허억...
나타와 관련된 꿈을 꾸게 된 것이 도대체 무슨 연유인지 알 수는 없다. 그저 어제 한 번 학교에 전학(? 입학?)인사를 한 걸 봤고, 하루 종일 같이 수업을 들은 것 말고는 없었다. 나타는 어제 하루 시종일관 수업이 지루하다는 태도로 일관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우려했던 사고를 친 것은 없었다. 조용히 본인이 원래 쓰던 무기를 다루듯이 한 손으로 펜을 휘돌리고 있었을 뿐...
혼란스럽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역시나) 게임기를 보던 세하는, 문득 아직도 게임에서 대전 중인 석봉의 계정 접속 상황을 확인하고는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래, 지금이 진짜 현실이구나. 난 아직 괜찮은거구나. 안도의 한숨과 함께 다시 잠자리에 든 세하는, 2시간 뒤 똑같은 과정을 겪고 똑같이 깨어나 똑같이 거친 숨을 내쉬고 똑같은 방법으로 안도하며 잠자리에 들었... 응? 그럼 석봉은...?!
아침이 되어 주섬주섬 홈메이드 참치마요 삼각김밥 하나를 물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세하. 어머니로부터 일상적인 활동에는 위상력을 쓰지 말라는 절대적인 명령이 있었던 탓에, 사이킥 무브 두세번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학교를 뛰어서, 버스를 타서 가야하는 불편함이 있다. 그래도 그렇게 허겁지겁 뛰어가다보면 길을 걸어가면서 왁자지껄 떠드는 같은 학교 학생들, 매일 아침 애완견과의 산책을 즐기시는 머리 벗겨진 배불뚝이 아저씨, 아침 잠이 덜 깬 채로 베란다에 걸어놓은 빨래를 걷고 있는 젊은 부부의 모습을 볼 수...
- 빨리 빨리 비켜! 나 시간 없다고오!
있을리가.
늘 아침 조회시간에는 늦지 않았던 세하지만, 간밤의 2연속 악몽 소동으로 잠이 왕창 부족했던 세하는 그대로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녹다운이 되어버렸다. 물론 뒤에 있는 석봉도 녹다운이 되기 직전인 상태로, 그렇지만 혼과 열정을 담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 세하야, 무슨 일 있었어?
- (힘없는 목소리로) 야, 말도 마... 어제 새벽에 꾼 악몽 때문에 잠을 다 설쳤어...
- 뭔... 꿈이었길래 그래...
- 으... 지금은 얘기할 상황이 아냐...
- 알았다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잘도 웅얼대며 대화를 하는 둘의 옆을 귀찮다는 듯이 지나가는 그림자. 바로 어제 C반에 새로 온 나타였다. 하지만 나타가 등장하던 말던 석봉은 그저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세하는 나타의 움직임을 느끼고 온통 피곤한 와중에도 그 새벽 악몽의 여파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타는 세하가 움찔하던 말던 전혀 신경도 안 쓰고(쳐다봤는지도 모른다) 석봉의 뒷자리로 앉아 하릴없이 창문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잠시 뒤에 들어오신 담임선생님도 조회 중에는 애써 나타 쪽을 좀 피하시는 눈치셨다. 아무래도 심정적으로 꺼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어제의 일도 그렇고, 간밤의 악몽도 신경쓰인 탓에, 세하는 아침 내내 나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리도 그런 악몽을 꿨었는지 알 방법은 없지만, 계속해서 나타를 향해 시선이 왔다갔다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유리도 나타를 신경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세하와 유리의 은근하고 열렬한 관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타는 오전 수업시간 내내 책과 필기도구를 책상 위에 대충 얹어놓은 채 귀찮다는 듯이 수업을 바라보거나 창문을 바라보는 식이었다. 창문 밖에는 매 체육시간마다 각 반이 돌아가면서 체육 수업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점심시간이 되고 학생들이 줄지어 교실 밖으로 나와 급식실로 향했다. 매번 그렇듯 온 건물이 진동하는 점심시간이었지만,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나타는 교실에 앉아있었다.
- ...나타
- 왜? 버러지.
- ...그 버러지라는 말 안 쓸 수는 없냐
- 버러지한테 버러지라고 하는게 뭐?
- ...너 밥 먹으러 안 가냐
- 귀찮아. 별로 먹고 싶은 마음도 없고,
- ...그래도...
- 맛 없어
= (세하, 유리) 핵공감
갑작스러운 공감대가 형성된 셋이었다. 이 때 2학년 E반의 이슬비가 같은 교정 내에 있는 초등학교 6학년 미스틸테인을 챙겨서 C반 교실로 들어왔다.
- 어? 나타형 여기 계시네요?
- 뭐야 꼬맹이.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
- ...우웅... 형 저 미워요?
- (심쿠궁) ...크흠, 귀찮게 하지 말고 가라고 했을텐데
- 나타, 테인이한테 너무 뭐라하지 말아줘. 지금 점심시간이야. 급식실로 이동해서 점심 먹자.
- 안 먹어.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맛 없어
= (슬비, 테인) 핵공감
왠지 모르게 교실 안의 다섯명이 같은 공감대를 가지게 되었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던 사이, 유리가 결심을 굳힌 듯 나타의 손목을 붙잡아 끌었다.
- 뭐, 뭐야? 이 고깃덩어리가?!
- 자, 자! 그만 심각하자구. 급식실 밥 맛 없는거 다들 알았으면 대신 뭐라도 먹어야하지 않겠어? 매점 가자! 그래도 여기 나타가 온지 이틀째 되는 날인데,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서로 같이 한 것도 없잖아? 빨리 가자구!
- ...어, 어 그래. 매점이라도 가자. 나타, 오케이?
- 그래요 형! 정 맘에 안 들면 매점도 좋죠!
- ...짜증나니깐 그만 좀 해! 귀찮다니깐 그러네...
- 아무리 귀찮다고 점심을 거르고 넘어갈 수는 없는거잖아. 이왕 유리가 결심한 김에 다같이 매점에 가는 걸로 결정하자.
- 좋았어! 역시 우리 리더답게 단결이 빠르다니깐!
= (세하, 슬비) 어이... 그거 결단이라고 하는거 아냐?
점심에 대한 얘기가 오가는 사이 세하는 나타의 동향을 힐끗힐끗 보고 있었는데, 확실히 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분명 먼저 날아왔어도 날아왔어야할 짜증 섞인 공격이 아닌, 그저 귀찮다는 식의 말대꾸 정도만 하고 있었고, 유리가 팔을 잡아당기는 상황에도 그렇게까지 저항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 진짜... 좀 다르려는걸까?
온갖 나타에 대한 의문을 안고 세하는 검은양 멤버들(+나타)과 매점을 방문했다. 원칙적으로 초등학생들은 매점 이용을 못 하게 교내에서 규제하고 있었지만, 미스틸테인은 독일에서 온 탓에 급식실에서의 식사가 입맛에 잘 안 맞는 경향도 있어서 눈감아주고 있었다.
- 어? 이거 우리 아니에요 누나?
- 음... 그러네? 저번에 얘기했던게 이건가보구나. 검은양팀 전원을 모델로 해서 만든다고 했던게 이거였...던건가?
매점에 가보니 신제품이라고 나온 빵들이 있었다. 얼마 전 검은양 멤버들을 모두 불러모아서 스튜디오에 데려다가 모델로 찍어서 내겠다고 하던 상품인가보다. 그 때는 다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찍었던 사진들이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호기심이 들면서도 서로 민망한 모양이다.
- 이게 뭐야, 왜 내가 모델인 빵은 게임기랑 똑같이 생겼어? 이거 너무한거 아냐?
- 슬비 너는 머리색 따라서 딸기맛 미니크림빵이구, 나는... 뭐야? 그냥 왕찐빵같이 생겼는데 이거?
= (슬비, 빠직)
- 그건 그렇고... 제이 아저씨꺼는... 빵마저 왜 이렇게 음산하냐?
- 세하형! 이거 왠지 모양부터가 못 먹을 것 같아요...
- 그... 그래, 일단 이거는 다음에 한 번 먹어보는걸로 하자... 나타, 너도 뭐 먹을래?
- ......(부스럭)
여전히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나타는 게임기 모양의 이세하 모델 빵을 하나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계산대에서 혼자 계산을 하고는 매점 구석 원탁에 앉는 것이다. 이제 막 학교에 오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시선이 거슬리고 신경쓰인다는 행동이 역력했다. 뭔가 답답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세하와 검은양 멤버들은 빵과 우유를 하나씩 사들고 나타가 있는 원탁으로 향했다.
- ...에이, 나타! 그렇게 혼자서 허겁지겁 사서 들고 가면 어떡해. 같이 먹기로 했으면 같이 사야지. 안 그래?
- 음...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유리야. 그래도 같이 앉아서 먹으면 괜찮은거지 안 그래?
- 나타 형도 초콜릿 좋아하시나보다! 저도 그 빵 샀는데.
- 음... 이 빵 딸기 맛이 뭔가 심심한데... 뭔가 빠진 기분이야.
- ...(우물우물)
평소같으면 서로 웃고 떠들고 있을 검은양팀이었지만, 나타가 끼어들어오면서 원탁에 잠깐의 대화 후 깊은 정적이 자리했다. 그렇게 서로 빵을 몇 입 먹던 중. 나타가 빵을 먹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모두 놀라서 나타를 보고 있는데, 일어나 세하를 쳐다보고 있는 나타의 얼굴에 분노가 뒤섞인 듯한 짜증스러운 표정(그러니까 평소에 볼 수 있었던 표정보다 더 강한 짜증이 묻어나는)이 가득했다. 그리고는
- 워억?
갑자기 세하의 입에 게임기 빵을 쑤셔넣고는 열린 창문을 통해 사이킥 무브로 교실로 향하는 나타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멤버들이 모두 C반 교실로 급히 뛰어들어갔지만, 이미 나타는 자기의 짐을 모두 챙겨 학교를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따가운 햇살이 비추는 교실, 창문 밑 벽에 드리운 그림자가 더 짙게 눈에 띈다.
- 3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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