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길지 않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점심시간의 신강고등학교 검은양 팀의 동아리방.


- 이세하. 나타는 잘 지내는거야?
- 어? 아 물론... 잘 지내지. 특별한 일은 아직 없어.

말 그대로였다. 한바탕 습격 사건과 이주 소동으로 정신없었던 그 때를 빼고는 무난하고 평범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나타는 학교에 돌아온 뒤, 당연스럽게도 매사가 귀찮다고 짜증난다는 태도로 일관하고는 있었지만, 적어도 상처나 피해가 가는 행동은 굳이 하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가 그런 일에 휘말려서는 안 되는 처지이기도 했고, 꽤나 본인도 그런게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라는 걸 강조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학교로 돌아온 뒤로 되도록 곤란한 일은 엮이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였다.
세하의 집에서도 그다지 튀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저 학교에서 돌아온 뒤 밤만 되면 방에서 강한 기합소리와 함께 몸을 단련하는 듯한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을 뿐이다. 그리고, 세하는 그 기합소리와 활동이 어쩐지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세하 스스로도 왜 굳이 그런 상황에서 신경이 쓰여야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 때 나타의 습격 이후로 단순히 앞으로가 걱정되나보다 싶은 애매한 마음이라고 애써 정리했다.

- 자 모두 잘 들어줘. 우선, 지금 나타가 학교로 온지 시간이 충분히 됐어. 하지만, 세하와 유리가 쭉 봐왔듯이 그렇게 적응이 잘 되어가는 것 같은 모습은 아니야. 그래서 우선, 내일 학교 일정이 모두 끝난 후 조촐한 환영식을 좀 하려고 해. 학교에 온 뒤로 갑작스러운 일들 때문에 아직 혼란스러워 보이니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해.
- ...난 별로 내키진 않는걸.
- 이세하,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너는 좋든 싫든 어쨌든 같이 살고 있는 입장이잖아. 그리고 네가 나타에 대해서 아직 감정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이건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작전이라고.  우리는 이 임무에 사명감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해. 물론 나타가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면 더욱 좋고.
- 그래요! 처음에 우리와 마주쳤을 때는 그저 사납게 우리를 대했지만, 학교에 오신 뒤로는 예전에 봤던 것 보다는 나은 모습이잖아요. 세하 형도 파티에 한 번 잘 참여해줬으면 좋겠어요.
- 동생, 너무 그런거에 마음 쓰지 않는게 좋아. 어짜피 세상 모든 클로저가 우리같은 사람일리 없는건 오히려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그렇죠... 너무 잘 알아서 탈이죠...) 사람도 다양하듯이 클로저도 다양하고 그런 중에 좀 말 안 듣고 말썽피우는 어린애들도 있는 법이라고. 일단 우리가 품어보기로 도전한 이상 그렇게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모습만 내비치려고 하지 마. 내가 볼 땐, 썩 괜찮아질 수 있는 놈이라고.
- ...알았어요.
- 자! 그럼 우리 모두 준비를 해야겠지? 오늘 내로 준비할거지 않아 슬비야?
- 음, 일단 환영식과 관련해서는 간단한 파티를 진행할 예정이야. 적당한 케이크와 다과를 준비하면 될거라고 생각해. 나타를 위해 좀 더 확실히 준비할거니까 다들 내일까지 필요한 부분 다 체크하고 종례 끝나자마자 나타를 불러서 환영식을 하자.
- 알았다고.

그리하여 시작된 환영 파티 준비. 특별히 거창하고 요란하게 할 생각 없이, 소소하게 서프라이즈 파티 스타일로 꾸미기로 했다. 슬비가 미스틸테인과 환영 케이크를 만들기로 했고, 유리는 제이 아저씨와 함께 동아리방 내부 꾸미기를 진행하기로 했다(를 빙자한 개판 5분전인 내부 정리...). 지금까지 나타에게 검은양팀 동아리방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방 주변의 검은양팀 동아리방 이름표도 빼놓고 최대한 겉으로 티를 내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세하는 따로 무언가를 준비하도록 하기가 어려웠는데, 나타와 함께 사는 입장에서 괜한 티를 냈다가 서프라이즈가 깨지면 그것도 그것대로 난감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뭔가 해줄 수 있는게 있지 않을까 하는 세하는, 나타가 방에서 두문불출하는 사이 부엌으로 나와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참을 부엌에 있다가, 다 만든 것을 쥐고 2층으로 올라온 세하는, 두 방문 앞에 있는 좁은 복도 끝 창문에 걸터앉아있는 나타를 보게 되었다. 운동으로 땀에 젖은, 온갖 상처가 뒤덮은 험하고 단련된 몸이 그대로 드러난 나타가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거라고는 하늘과 집 담벼락 구석의 조그만 정원 밖에 없었지만, 그런 밖을 진지하게 보고 있는 나타의 눈빛 속에 알 수 없는 깊음이 있었다. 평소에 찾아볼 수 없었던, 귀찮음과 짜증으로 가려온 무언가가 있었다.
나타의 모습에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빠져들어 서있었던 세하에게 나타가 고개를 돌려 말한다.

- 왜? 짜증나게 왜 쳐다보는데?
- ...아 아냐. 너야말로 거기서 뭐하는건데?
- 됐어. 밖은 볼만큼 다 봤어. 짜증나게 하지 말고 빨리 너도 방으로나 들어가.
- 내 방 내가 들어가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너도 들어가 그럼. 그 전에 우선 씻고.
- ......

한참을 쳐다보다 찔린 세하가 나타에게 소심하게 쏘아붙이자 나타는 두른 수건을 손에 휙 휘둘러 고쳐잡은 뒤에 세하를 지나쳐 1층 욕실로 향했다. 지나쳐간 나타를 보던 세하는, 그 길로 다시 방으로 돌아가 침대로 직행했다. 분명 나타가 세하가 손에 든 그것을 못 보고 지나쳤을리는 없다. 다만 적당한 크기의 봉투에 가려져있어서 나타가 신경 안 쓰고 지나갔을 확률도 있는 것이다.
내일 학교로 가져갈 이것을 미리 책가방에 챙겨두며 불안함과 민망함에 혼자 잠깐 부르르 떨었던 세하는, 이내 그것에 대한 신경을 싹 꺼버리고 게임에 몰두하려하자, 이어 다가오는 생각은 방금 전에 마주친 나타에 대한 것이었다. 그저 평소에는 서로의 방에 틀어박혀있느라 보지 못한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나타가 창가에 앉아서 무언가 창밖 멀리를 내다볼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그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그가, 왜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을까? 갑자기 닥쳐온 온갖 생각 때문에 흐트러진 정신을 수습하기 위해 세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잠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방 구석에 있는 창밖을 본 세하는 문득, 찬란한 푸른 별빛이 하늘을 수놓은 풍경을 보게 되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신서울의 하늘. 평소엔 그런 것에 무심하던 세하도, 감성에 푹 젖은 지금같은 순간에는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해야할까...
문득 문 밖에서 다 씻고 올라온듯한 나타가 복도를 지나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정신이 든 세하는 다시 게임에 몰두하려고 하지만, 복잡해진 마음은 좀체 가라앉질 않는다. 결국 게임을 더 하는 것을 포기하고 침대에 누운 세하. 여느 때와 달리 잠이 금방 오는 듯하다. 쏟아지는 잠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세하는 나타에게 생각으로 저녁 인사를 건넨다.

= 잘 자고, 내일 보자 나타.



아침이 밝고, 또 다시 같은 아침 일상이 반복된다. 아침잠이 많지 않은 나타가 먼저 일어나서 내려가고, 세하는 침대 위에서 부스럭부스럭대다가 어머니의 잔소리에 마지못해 일어난다. 아침을 먹고, 집에 보관된 장비와 책가방을 챙겨 학교로 향한다. 물론 나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타는 집을 나옴과 동시에 사이킥 무브로 뛰어올라가고, 세하는 다시 학교로 가는 길을 뛰어서...

- 엨?

갑자기 나타가 세하를 낚아채더니 날아오른다. 목덜미 쪽을 잡혀서 켁켁거리는 세하를 무시한 채 몇 번의 착지와 이동 끝에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에 도착한다. 갑작스러운 비행에 당황스러운 세하는 먼저 앞서가는 나타를 향해 불만을 담아 툴툴댔다.

- 야, 말도 없이 낚아채서 날아가냐?
- ...빨리 등교시켜줘도 불만이냐. 매번 짜증나게 넌 왜 능력도 있는 놈이 두 발로 뛰어서 가냐?
- 그거야 우리 엄마가 일상적인 일에는 위상력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하셔서지. 너도 우리 엄마 보고 살면 그 말 함부로 무시 못 하는거 알만하지 않냐?
- ...쓸모없게... 앞으로 학교 갈 때는 내가 끌고 갈테니 그런 줄 알고 있어. 귀찮은 짓을 골라서 하는 것보다 짜증나는 건 없으니까.
- ...어이, 그럼 니가 날 끌고 오는 것 자체가 귀찮은 짓 아니냐?
- ...그냥 빨리 가라

뭔가 이상한 의미의 말을 남긴 나타가 먼저 발길을 재촉했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세하가 그를 뒤쫓아서 C반 교실로 향했다. 교실에 도착하니 웬일인지 일찍 온 유리가 북적북적한 교실 사이에서 세하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이번 환영식을 유리도 꽤 신경을 쓰고 기대하는 모앙이다. 유리의 뒤에 보이는 나타는 유리의 그런 모습이 또 귀찮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다시 창밖을 본다. 아직 아무것도 모를 나타를 생각하면 세하마저도 잠깐잠깐 피식 웃음이 나오지만, 나타에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참고 노력했다. 정말로 별로 티내지 않고 최대한 무난하게(특히 세하는 어젯밤의 일로 더더욱) 하루 일과를 쭉 보낸 멤버들은, 계획했던대로 종례가 끝나자마자 동아리방으로 들어가 서프라이즈를 준비했고, 집으로 향하기 위해 짐을 싸고 있는 나타에게 유리가 다가가 다급한 척 불러냈다.

- 나타! 가방 다 챙긴거야? 지금 빨리 같이 좀 가자. 너 데리고 갈 곳이 있어!
- ......?
- 빨리! 시간 없다고!

갑작스러운 유리의 부름에 나타는 또 시작인가 하고 그다지 신경쓰지 않은 채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역시나 나타를 순순히 동아리방으로 오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것인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서유리가 누구인가? 서둘러 떠나려는 나타를 낚아채듯이 붙잡아 순식간에 동아리방 앞까지 끌고 와버린 것이다.

- 켁켁... 짜증나게 뭐하는 거야? 집에 가려는 거 안 보이냐?
- 야 나타, 집에 가는 것도 가는 건데 지금 네가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내가 널 굳이 붙잡아 불러낸거라구! 자, 여기 니 눈앞에 보이는 문 있지? 거기로 열고 들어가.
- ...칫 또 난 뭔가 했네. 어제 그 버러지가 부엌에서 열심히 뭔갈 했던 모양인데... 이것 때문이었던거냐?
- ...뭐? 세하가 뭘 했었어?
- 나도 걔가 뭘 했든 상관할 바는 아냐. 하지만, 어제 그 집 부엌에서 냄새가 났었던데 이거였을 줄이야.
- ...에라잇!

이미 뭔가 눈치채고 있는듯한 나타를 보면서 흔들린 유리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 문을 열고 나타를 밀어넣어버렸다. 그리고,

- (퍼펑)

폭죽소리는 들리는데 그 뒤에 있어야할 대사가 들리질 않는다. 동아리방 안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세하가 엄청 눈총을 당한 모양이다. 민망한 표정의 세하가 동아리방에 들어온 나타를 쳐다본다. 나타의 표정이 일그러지지만, 그건 화로 일그러진게 아니다. 유치하고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비웃음이라고 표현하는게 적절할까?

- ...어쨌든 나타, 함께 하게 된걸 환영해. 앞으로도 편하게 잘 지내보자.
- 그래 뭐, 이왕에 온거 친구 하나 못 만들고 나가는 것만큼 아까운 것도 없잖아? 나타 너도 돌아온 김에 한 번 노력해보자고.
- 제이 아저씨 말이 맞아요! 나타 형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모일 수 있게 됐으니 함께 재밌었으면 좋겠어요!

검은양 멤버들의 환영멘트가 잇따라 들려오지만, 나타는 그런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는 듯이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이크와, 세하가 어젯밤에 나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했으나 생각보다 허무하게 들통나버렸던, 쿠키를 흘겨보고 있었다. 이윽고 멤버들의 열렬한 시선과 함께 세하가 만든 쿠키 하나를 집어먹은 나타. 의자에 걸터앉아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올리며 쿠키를 먹는 모습에서 평소에 쉽게 보지 못할 각이 살아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세하가 잠시 감상모드에 돌입하다 움찔하던 사이, 나타는 이내 이런 상황에 흥미를 잃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 ...이런거 준비할 시간에 너희들 클로저 요원이라는 임무나 잘 할 생각들 해. 쓸데없는데 낭비하지 말라고. 별로 고마워할 것도 없으니 그만 가본다.

동아리방을 나서려던 나타와 문 앞에서 약간 멀뚱히 서있던 세하가 순간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나타는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세하의 머리를 한 번 스윽 스치듯 쓰다듬더니 입꼬리 한 쪽을 올리며 동아리방 문을 나섰다. 뻥찐 표정으로 나타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세하의 뒤로 유리와 슬비가 쿡쿡대면서 웃고 있었고, 제이는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얘기했다.

- 뭐, 그닥 관심을 보이진 않긴 했지만, 성의 표현은 된 것 같군. 아무래도 이세하 네가 좀 해낸 것 같은데... 안 그래?
- ㄴ...네? 뭐가요?
- 동생, 눈치 있게 상황파악 좀 하자고. 웬만하면 평범하게 끝났을 어색한 환영식이었는데 네가 몰래... 몰래? 어쨌든 만든 쿠키 덕분에 이 정도는 된거라고.
- 그...그런가요? 그럼 뭐...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건가요?
- 그래! 세하 네가 그래도 센스있게 한 건 해준 덕분인 것 같은데? 약간 곤란할 뻔하긴 했지만 다행이야 다행! 좋았다구!
- 뭐 부탁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나름대로 좋았어. 자, 이제 그럼 우리 모두 방을 정리하고 해산하자.
- 저, 슬비 누나! 이 케이크 우리 좀 먹으면 안 될까요? 열심히 다들 준비한 건데 이대로 두고 가기엔 좀 아까워요.
- 아냐 테인아. 지금 나타가 이 케잌을 두고 가긴 했지만, 이 케잌은 우선 나타꺼야. 그러니까 일단 세하가 챙겨서 나타한테 가져다주는걸로 하자.
- 뭐, 그래봤자 걔는 눈길도 안 줄 것 같긴 하지만 말야.

긴장에 사로잡혀있던 분위기가 풀리고 다시 다소 밝아진 분위기의 검은양팀 동아리방. 불안불안하고 싱거웠지만 어찌됐든 좋은 결말이 난 듯한 환영식을 정리한 멤버들은 다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맑은 햇살을 받으며 서로 즐겁게 장난을 치고 놀아주는 미스틸과 유리를 보는 제이의 눈빛도(비록 가려져있지만) 환해보인다. 슬비는 다시 또 유정과 통화를 하고 있고, 세하는 케이크를 챙겨들고 역시나 게임을 하고 있다. 맑은 하늘 아래 검은양 멤버들의 걱정 중 하나도 일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저 멀리 날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환영식을 마치고 난 뒤에도 깊은 고민에 잠긴 한 사람이 있었으니,

= 그나저나... 어젯밤이나 방금이나 왜 자꾸 나타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걸 가지고...

여전히 구름이 잔뜩 낀 듯 혼란스러운 이세하의 머릿속이었다.



- 6화에서


Posted by SamMak
,

나타를 노린 습격이 있고 며칠이 지나고, 잠시 유니온의 보호관찰 속에 학교로 나오지 않던 나타가 학교로 나오게 되었다. 검은양팀에게도 관련된 내용이 전달되었지만, 그 때 당시처럼 돌발적인 나타의 행동이 있을 경우 확실한 보호대책을 강구하기 어렵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나타의 교복에 달려있던 구속력 제한을 일정부분 더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김유정은 검은양팀 멤버들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면서 그들을 믿기 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했노라고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어째 찜찜한 기분을 떨쳐낼 수는 없는 것이다.

나타가 돌아온 것을 본 C반의 다른 학생들은 애써 나타를 신경쓰지 않는 모습들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나타의 과거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알려진 바는 당연히 없지만, 모습과 분위기에서 풍겨져오는 인상이 결코 긍정적이진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피하는 분위기가 생기는 모양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교실 분위기지만, 한 구석의 공기만 괜시리 무겁게 느껴졌다.


- (작은 목소리로)나타! 그 때 일은 괜찮은거야?

분위기를 무마해보기 위해 유리가 작은 목소리로 나타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정 많은 유리는 나타의 피습 이후로 줄곧 걱정을 해온 탓에 나타가 돌아오자 한 번 물어보기로 작심한 모양이다. 그에 비해 나타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하지만...
예상대로 굳이 입을 열지 않는 나타를 보면서 유리는 못내 걱정을 떨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수업 중간중간 쉬는 시간만 되면 나타에게 장난을 걸기 위해 노력하는 듯 했지만, 그다지 쉽게 마음을 열 생각이 없는 나타에게는 그저 귀찮고 짜증나는 짓이었을 뿐이다. 점심시간이나 몇몇 쉬는 시간에는 슬비도 와서 사명감에 찬 걱정어린 얘기를 조금 해주었지만, 역시나 나타의 반응은 귀찮다고 석연찮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어째 그런 반응 중간에도 세하를 힐끗 쳐다보는 행동이 계속 됐는데, 그러지 않을 나타라는 놈이 갑자기 그런 모습을 보이니 세하도 신경쓰지 않을래야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 이 자식은 그래도 나한테 뭐 고마울 수 있는 감정이라도 있는건가? 나도 저 놈 귀찮은데...

그렇게 신경쓰이고 불편한 학교의 하루 일과가 마무리되어갈 쯤...

- ...야, 이세하.
- 왜?... 어? 뭐라고?
- 널 불렀다. 뭐 특별한거 있냐?
- ...아냐 아니, 왜 부르는건데
- 잠깐 따라와봐라.

잠시 주저하던 나타가 세하의 옷깃을 부여잡아 끌고 교실 밖으로 나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안이 벙벙벙해서 그대로 끌려나간 세하에게 나타가 말을 건넸다.

- 너, 어디 사냐?
- ...ㅁ...뭐? 뭐라고?
- 어디 사냐고 물었다. 짜증나니까 빨리 말 해.
- 아니 그러니까 그걸 도대체 왜 묻는데?!

당장 며칠 전에 있었던 악몽을 기억하고 있는 세하는 당혹스러움에 반사적으로 거부반응을 나타냈지만, 이어서 떨어지는 나타의 말에 세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 당분간 너네 집에서 있어야 돼. 그 뿐이다.
- ...ㅁ...뭐? 그게 무슨?!
- 한 번에 못 알아들어? 나도 지금 짜증난다고.

말 그대로 있는대로 짜증을 내며 나타는 다시 교실로 들어갔다. 곧 종례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세하는 생각을 정리했다. 어짜피 다시 또 유정 누나에게 전화를 해봐야 돌아오는 대답은 왠지 뻔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이번 일로 유정 누나도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으니 굳이 또 전화를 해서 이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패스하고, 당장 이 나타라는 놈을, 그것도 자기 집으로 들여와야한다는 자체가 이해가 안 됐다. 우리 집은? 우리 엄마는 나타가 우리 집에 온다는 상황을 알고는 있는거야?
문득 여기까지 생각이 뻗친 세하는 종례시간인 걸 금새 망각한 채 다시 화장실로 달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뚜르르르르)어 세하야. 무슨 일이니?
- 엄마! 잠깐만요 나타가 우리 집으로 와야한다는게 무슨 소리에요?
- ...나타 잘 챙겨서 같이 오너라.
- 아니 엄마! 이게 무슨 소리냐고요?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거에요?
- 잔말 말고 시키는대로 하려무나. 무사히 잘 데려와. (처커득)

이미 다 알고 계셨...었으니 이런 상황이 펼쳐졌겠지. 라는 생각과 함께 세하가 힘빠진 발걸음으로 다시 교실로 향했다. 이미 다른 반들은 종례를 모두 마친건지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다소 심란한 마음으로 교실에 돌아온 세하는, 아직 가방을 싸서 집으로 갈 준비를 하지 않은 C반 학생들과 담임선생님의 뜨거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떨어지는 불호령.

- 이세하! 어딜 갔다가 이제 들어오는거야! 너 때문에 여기 있는 친구들 다 기다리고 있다!

아뿔싸... 나타 때문에 종례를 잊어버린걸 뒤늦게 떠올리고 하얗게 질린 세하였다. 그리고, 또다시 시작된 잔소리와 함께 종례시간은 30분이나 더 길어지고 말았다. 또한 잔소리를 듣는 내내 세하는 앞으로 나와 벽을 바라보고 손을 들고 있어야만 했다.



팔 아프고 귀 따가운 종례가 끝나고, 슬비와 유리, 테인은 잠시 검은양 동아리방으로 가야한다며 먼저 떠났다. 세하도 동아리방으로 향하고 싶었지만, 일단 나타를 집으로 안내해줘야할 임무가 생겨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타를 데리고 멤버들과 헤어지고 말았다. 집으로 향하던 중 문득, 이 둘이서 교복을 입고 같은 집을 향하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세하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현실로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으며 순간 소름이 돋고 마는 것이다.

- ...뭐냐, 버러지.
- 아, 아니야 아무것도.
- 방금, 뭔가에 놀라는 것 같았다고
- 신경 쓰지 마. 매사에 귀찮다는 놈이 왜 이런건 굳이 신경쓰는데?
- ...글쎄
= ...도대에 이 분위기는 뭐야

그닥 평소같지 않은 예민한 반응의 나타가 익숙하지 않은 세하는, 역시나 평소같지 않은 분위기의 괴리감을 느끼며 나타를 데리고 집에 도착했다.

- 어서와라. 저녁 먹을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 왔으면 일단 가방 풀고 있어라. 그리고 손도 좀 씻어놓고. 밖에 나갔다 왔으면 항상 먼저 씻으라고 얘기했지?

저녁 시간이 다가오면서 분주해지는 주방이다. 국 끓는 소리가 요란하게 주방을 채우고, 밥상머리에는 평소 봐왔던 2개의 밥그릇이 아닌, 또다른 하나의 밥그릇이 더 자리해있었다. 반찬도 왠지 평소보다 더 많은 느낌이라고 할까. 첫 날이라고 손님맞이를 넉넉히 해주시려는 모양이다. 2층에 위치한 쓰지 않던 집구석의 방 하나는 아침낮 사이에 사람이라도 불러서 한 건지 몰라도 나타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그닥 깔끔히 정리되지 않은 채로 모여있었고, 그 방에 나타가 들어가 가벼운 방 정리를 하고 있었다. 바로 옆 방의 세하도 짐을 풀어놓은 채 침대에 누워 온갖 생각에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 세하야. 짐 다 풀었으면 좀 나타하고 나와라. 밥 먹어.

어머니의 호출에 세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로 옆 나타의 방은 굳게 닫혀있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나타는 방 구석 의자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자신의 무기를 휘휘 돌리고 있었다.

- 야! 나타. 집에서 위험하게 그걸 돌리고 있으면 어쩌라는거냐? 빨리 나와. 밥 먹게.

순간 세하를 향해 쏘아보는 눈빛에 세하는 살짝 움찔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무심하게 일어나 무기를 손에 챙겨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나타의 뒤를 따라 주방으로 내려온 세하. 나타는 거실 한구석에 있는 세하네 집 장비 보관함 옆에 무기를 내려놓고 식탁으로 되돌아왔다. 차원전쟁을 관통한 조잡했던 구식 건블레이드 하나와, 짧은 순간 온갖 고초를 겪으며 세하와 함께 성장해온 건블레이드 하나, 그리고... 수많은 이들의 말라붙은 핏자국이 담겨있을... 저 쌍검. 희생된 영혼들의 속박이 저 두 검의 운명을 이은 줄처럼 나타를 그토록 짓눌러왔으리라.

- 잘 먹겠습니다
- ......

식탁은 조용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은 더더욱 조용하게 숟가락과 밥그릇, 반찬그릇이 부딛히는 소리만 부엌을 요란하게 울렸다. 나타는 생각보다 음식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다. 있는 반찬이며 국이며 괜찮게 잘 먹는 모습이었다. 물론 나타가 언제나 그렇듯 그런걸 가릴 처지가 있었겠냐마는, 어쨌든 뭐든 잘 챙겨먹는 모습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인상을 갖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법이다. 물론 나타가 그런걸 의도했을리는 만무하지만서도...

- 밥맛은 괜찮았는지 모르겠구나. 들어가서 쉬도록 하렴. 그리고 세하 너는 여기 있는 식탁 모두 정리하고. 설거지 해놔라.
- ...네

2층으로 올라가려던 나타는, 세하가 설거지를 한다는게 문득 궁금해서인지 부엌 정수기에서 물을 한 컵 마시면서 대충 어설프게 서성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의도가 티나는 행동에 세하는 뭐라 할 말도 잊은채 그저 설거지에 집중하기로 한다. 달그락달그락 하는 소리와 함께 평소처럼 여유있는 솜씨로 설거지를 하는 세하. 잠깐 물을 더 마시던 나타는 그 모습을 조금 보더니 바로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설거지과 몇몇 집안일을 마친 세하는 다시 게임을 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고, 그 뒤로 나타와 세하 모두 방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물론 세하의 어머니도 둘을 찾는 일은 딱히 없었다.

뜬금없이 당황스럽고 마음만 심란해지는 하루가 또다시 이렇게 지나가는 것이다.

- 5화에서


Posted by SamMak
,

가방까지 들고 사라진 나타는 역시나 모든 학교 수업 일정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온지 고작 이틀만에 벌어진 사건으로 검은양 멤버들은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그 이후에 있었던 수업내용들을 단 하나도 제대로 귀담아듣지 못한 채 학교 일과를 마쳐야만 했다.

검은양팀이 나타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받은 그 날 그 자리에서 함께 들은 바에 의하면 나타는 벌처스 소속 팀에서 나와 유니온의 지원을 받으며 혼자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무슨 이유로 나타를 혼자 생활하게 내버려두는지 그 속내를 도통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본인이 원한다고 했으니 그 범위까지는 맞춰주기 위해 유니온이 신경써주는 것같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일이 벌어진 이상 기존에 나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고려할 때 결코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할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타에 대한 생각을 조금 하다가 문득 걸려오는 전화,

- (뚜르르르르) 어, 슬비야.
- 세하야! 지금 유정 언니한테 연락이 왔어. 나타가 학교를 이탈한 뒤에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고 쫓기고 있대!
- ...뭐,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 나도 지금 정확한 정황은 모르겠어. 한강변 일대에서 너무 노출이 심한 상황이라 자칫하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인 것 같아.
- 알았어, 지금 바로 가볼게.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소식에 세하는 가지고 있던 건블레이드를 꺼내들고 급히 나타가 쫓기고 있다는 강변길로 이동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곳이니만큼 금방 도착할 수는 있었지만, 나타의 도주 실력도 아주 뛰어나서인지 쉽사리 그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세하는 기존에 강변길에 먼저 도착해있던 슬비와 유리, 미스틸테인을 만났다.

- 세하야! 이 쪽이야!
- 어, 슬비야. 지금 막 와서 둘러보던 참이야. 어떻게 됐어? 나타는?
- 아직 안 보여. 나타를 추적하는 사람들도 동일한 위상능력자인 걸로 예측되고 있어. 그래서 지금 나타가 더욱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는데다가, 나타는 입고 있는 교복 때문에 위상력을 공격에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서 오래 버티지 못할거야.
- 제길... 일단 다들 핸드폰 가지고 있잖아. 흩어져서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는걸?
- 알았어 세하야. 테인이는 유리랑 같이 붙어서 움직이도록 하고, 어? 제이 아저씨?
- (슈우웅, 탁) 어이쿠 허리야... 아, 그래. 무슨 일이 터졌다고는 들었어. 여기서 이렇게 머뭇거릴 새가 있나? 빨리 찾아내봐야지. 다들 몸조심하고 가자!

검은양 팀이 모두 흩어졌다. 자신의 힘을 온전히 활용할 수 없는 제약에 걸려있는 나타에게 지금은 굉장한 생명의 위협이 되는 순간이었다. 분명 그를 다시 세상으로 끄집어낸 유니온도 나타에게 이런 운명을 안겨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슬비에게 지시받은대로 도심지 방향으로 향한 세하는, 급하게 움직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 옥상 위를 바쁘게 뛰어다니는 실루엣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타로 추정되는 소년이 그 뒤를 쫓는 추격자 3명에게 위협받고 있었다. 위치는 신논현역 근처. 건물 아래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저 공중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깨닫지 못한 채 여유로운 퇴근길을 맞이하고 있었다.

- 제길... 이 개같은 놈들을 눈앞에 두고도 도망다녀야된다니... 제기랄!!!

계속된 방어와 도주로 지쳐가던 나타가 난데없이 짜증섞인 고함을 질렀다. 나타에게는 지금의 이 위협이 그렇게 없던 일이었진 않지만, 그래도 과거에는 그런 위협에 어느 정도 대항할 수 있는 힘과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유니온에 의해 자신의 능력이 상당부분 묶여있는 탓에 지금은 공격적인 행동에 힘을 쓰려고 할 때마다 오는 전기 통증 때문에 이따금씩 행동에 제약이 오고, 그로 인해 계속해서 추격자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가끔씩 건물을 뛰어넘을 때 통증이 오면, 짜증스럽게도 저 길바닥으로 떨어져 험한 꼴을 당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타에게 전에 없던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조금씩 심어주고 있었다.

- N-9 보고, 전방 120m 목표물 지속적으로 저항하며 도주 중. 현재 N-11, 14 요원과 함께 3방향으로 목표물을 몰아 목표지점에 도달시킬 예정. 지원은 필요 없... 크앜!

지휘부와 무선 통신을 시도하고 있던 N-9이라는 요원이 허공에서 불의의 습격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정신을 잃은 N-9은 천천히 신논현 거리 한복판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 당황한 나머지 두 요원 중 한 명이 N-9을 구출하기 위해 몸을 돌리던 사이

- 흐아아아아압! 받아라!

이세하의 폭발 공격이 N-11의 어깨 근처를 스쳤다. 순간 당황해 준비가 미흡했던 N-11은 세하의 폭발공격으로 어깨에 부상을 입고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 으라앗! 촤! 아다다다다다다!

요상한 기합과 함께 N-11의 등 뒤를 무서운 속도로 타격하는 손놀림이 보였다. 연락을 받은 제이 아저씨가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이다. 뒤따라온 슬비와 테인은 허공 위에서 N-14와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유리는 지상으로 낙하하던 N-9를 건져서 멤버들이 있는 건물 옥상으로 착지했다. 나타에게 위협을 가하던 추격자 세 명은 예상치 못한 기습에 모두 확실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제압되었다.

- ...휴, 다 됐구만. 그래, 슬슬 이 사람들 한 번 심문을 해봐야하는건가?
- 일단, 유정 언니께 상황 보고는 다 마쳤어요. 지금 유니온에서 조사를 위한 요원을 급파하고 있다고 해요.
- 그래? 그럼 뒷일은 조사하러 올 사람에게 맡기고 우리는 좀 쉬어도 되는...

그리고 그 순간, 제압되어 옥상에 묶이거나 널부러져있는 추격자들의 몸에서 문득 삑삑하는 카운트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그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정신을 잃지 않은 추격자의 눈이 공포에 질린 채 갑작스러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 ...다들 도망쳐!

제이의 외침과 동시에 검은양 멤버들이 주변 건물로 흩어졌고, 바로 다음 순간,

- 콰앙!

검은양 멤버들이 모여있던 그 건물 옥상에 묶인 추격자들의 몸이 동시에 폭발했다. 갑작스러운 큰 폭발의 여파로 건물 옥상이 파괴되고 그 잔해가 주변으로 휘날렸다. 지상에는 갑작스러운 폭발로 인해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여기저기로 대피하고 있었다.
폭발로 인한 후폭풍이 잠시 잠잠해진 뒤,

- ...어이! 다들 괜찮아?
- 네, 덕분에요.
- 이런 제기랄. 짜증날 정도로 귀찮은 상황이로군. 주어진 추격 임무를 실패했다는 이유로 사람을 폭발시켜 죽게 하다니, 누구의 짓인지는 알 수 없어도 정말 속이 다 뒤틀리는 놈들이군.

그리고 그 때, 유니온에서 급파된 조사팀이 도착하여 폭발이 있었던 현장을 허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 어이, 유니온 양반. 이 놈들 죽었다고,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흔적을 보면 무슨 상황이 있었는지는 알테고 말이지.
- ... 또 그들이군요.
- 조사팀 아저씨, 짐작가는 데가 있으신건가요?
- 아, 네. 이세하 요원. 일단은... 여러분도 전해들으셨었겠지만, 나타의 처지를 이렇게 만든 배후세력이 존재했다는거 기억하시겠죠? 일단... 유니온 측도 그런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정보는 알고 있지만, 그들의 방식이 매우 잔인하고 비정하기 짝이 없다보니... 이렇게 임무에 실패하고 붙잡힌 요원들의 경우에는 살려두지 않고 가차없이 이런 식으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하죠. 그런 탓에 그들의 정보를 캐내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번에도 최대한 빨리 도착해서 그들의 죽음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실패로군요.
- ... 이 자들이 나타와 관련되어 있고, 나타를 계속해서 노려서 이런 일을 벌인거란 건가요?
- 네, 일단 현재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연성 있는 추측이에요. 좀 머리 아픈 일이긴 합니다.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굉장히 어렵죠.
- ......
- 잘 아시겠지만 나타군을 다시 정상적인 위상능력자로 돌려보내주기 위한 과정 중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절대로 좋지 않죠. 사실 그런 이유가 있어서 나타군을 여러분과 함께 하도록 한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무작정 강요한 건 아닙니다. 나타 본인도 이런 결정이 있기까지 본인의 의사표현이 있었기도 하고요.
- ... 네? 나타가 직접 우리 학교에 오기로 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 그 뿐만 아니라, 이세하 요원이 있는 반으로 가겠다고도, 했었으니까요.
- (일순간 표정이 일그러지며) ...나타가 그랬다고요? 도대체 무슨 이유로요? 그 자식 나한테 저번에 만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짜증 섞인 말투로 위협밖에 할 줄 모르는 놈이 왜 날 찾은거래요? 저번에 못 낸 승부라도 내겠다는 심산인거에요? 또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준 이유는 뭔데요? 내 의사는 중요하지도 않은거에요?
- 이세하 요원, 지금 나타군으로 인해 느끼고 있을 요원의 불안함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명심해야할 것이 있어요. 이거는 단순히 학생 한 명이 학교로 전입해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주지받았었겠지만, '작전'이에요. 검은양 팀에서 맡아서 진행해줘야할 일이라는 거죠. 물론 어려움이 따를 겁니다. 유니온에서는 여러분의 능력을 높게 사고 있어요. 신서울의 영웅이라는 칭호가 절대 거저 얻어진게 아니라는 건 여러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겁니다. 나타군에 대해서는 일단 우리 쪽에서 잘 수습해서 내일부터 다시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예정입니다.
- ......
- 일단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저는 여기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검은양 멤버 여러분 모두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이만,

그렇게 조사팀 요원이 떠나고, 폭발의 상흔이 남은 건물의 옥상 위에 남은 다섯 멤버들은 각자의 심란한 마음이 드러난 표정으로 우두커니 한동안 서있었다.

- ...나타는... 물론 일단 무사하겠죠? 아저씨?
- 응, 세하야. 마지막으로 쫓던 요원도 나타에게 근접하기 전에 나랑 테인이가 제압했어. 나타는 최대한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잘 도주했을거야. 우리의 역할은 오늘 여기까지인 것 같아. 다들 수고했구, 오늘은 여기서 이만 흩어지자. 내가 유정 언니한테 보고해놓을게.
- 자자, 일단 다들 무사하잖아! 제이 아저씨도 갑자기 나와서 무리하긴 하셨지만(제이: 쿨럭쿨럭) 그래도 우리 모두 아저씨 말처럼 몸만 멀쩡하면 된거잖아. 뒷일은 슬비가 조금만 맡아주구, 나타 걱정 그만하고 우리도 빨리 쉬러 가자! 난 지금 집에 저녁밥이 식고 있다구...
- 그래, 다들 몸조심 했으니 그걸로 된거지. 빨리 쉬러들 가자고. 오늘 들렀어야 할 약재상도 이미 문을 닫았을 것 같은데... 어쩔 수 없겠구만.
- 저도 석봉이 형이 가르쳐주기로 한 게임 아직 덜 배웠어요! 빨리 가서 놀고 싶은걸요!
- ...테인아 다른 건 괜찮은데 그건 안 배우면 안 되겠니?

어쩔 수 없는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검은양 멤버들은 일단 뒷일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기로 한 채 각자의 갈 곳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 무렵. 나타는 도망치던 몸을 잠시 한강변으로 옮겼다. 누구였는지 정확한 실루엣을 보진 못했지만, 그런 방식의 공격은 분명히 이세하였다. 그... 버러지같은 놈이 갑자기 와서 자신을 도와준 것이다. 자신에게 온갖 짜증을 유발하는 그 놈이...

- ...제기라아아아아아아알!

한 없는 분노의 외침이 강바람을 타고 하늘로 흩어졌다. 해가 거의 다 져가는 하늘에, 희미한 별빛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 4화에서


Posted by SamMak
,

그 날 밤, 평소와 다름없이 게임을 하던 세하의 곁으로 누군가 살며시 찾아왔다.


- 어이 버러지 같은 놈, 오늘에서야 제대로 만나는 것 같은데
- ...? 뭐, 뭐야? 네가 왜 여기에 있는거야?
- 지난 번에 내지 못한 승부를 내기 위해서다. 간다!
- 아 이 자식! 왜 갑자기 멀쩡히 있던 사람을 건드려!

나타의 기습에 당황한 세하는 황급히 건블레이드를 꺼내들어 방어하려 했지만, 어쩐지 그 때와 다르게 압도적으로 힘에서 밀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필시...

= 뭐야... 위, 위상력이... 안 나와?

세하의 위상력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일시에 위상력이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김기태 아저씨는 그래도 징후는 느끼면서 위상력을 잃어버렸다며! 이렇게 긴급한 상황에 갑자기 위상력이 나오지 않는 건 무슨 이유지? 도대체 왜?!

- 받아랏!
- 크아악!

혼란스러운 세하의 틈을 노린 나타의 일격에 세하가 방 구석으로 나뒹군다. 넓은 방이 아니라 피할 구석은 더더욱 없다. 자세히 보니 급작스럽게 꺼내들어 방어에 사용한 건블레이드는 나타의 위상력에 파괴당한 모양이다. 더 이상 피할 구석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세하는 마지막을 직감했다. 그래도 짧은 생애를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나타에게 달려들어 최후의 주먹이라도 갈기려는 그 순간,

- (푸욱)

......

- 허헉... 허억... 허억...

너무나 갑작스럽고 생생한 꿈이었다. 흐르는 이마의 땀을 훔친 채 세하는 게임기의 시계를 보았다. A. M. 03:45. 찬란한 별빛이 유성검 쏘듯이 방구석을 비추는 시간이었다.

- 도대체... 무슨... 꿈인거지... 허억... 허억...

나타와 관련된 꿈을 꾸게 된 것이 도대체 무슨 연유인지 알 수는 없다. 그저 어제 한 번 학교에 전학(? 입학?)인사를 한 걸 봤고, 하루 종일 같이 수업을 들은 것 말고는 없었다. 나타는 어제 하루 시종일관 수업이 지루하다는 태도로 일관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우려했던 사고를 친 것은 없었다. 조용히 본인이 원래 쓰던 무기를 다루듯이 한 손으로 펜을 휘돌리고 있었을 뿐...
혼란스럽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역시나) 게임기를 보던 세하는, 문득 아직도 게임에서 대전 중인 석봉의 계정 접속 상황을 확인하고는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래, 지금이 진짜 현실이구나. 난 아직 괜찮은거구나. 안도의 한숨과 함께 다시 잠자리에 든 세하는, 2시간 뒤 똑같은 과정을 겪고 똑같이 깨어나 똑같이 거친 숨을 내쉬고 똑같은 방법으로 안도하며 잠자리에 들었... 응? 그럼 석봉은...?!



아침이 되어 주섬주섬 홈메이드 참치마요 삼각김밥 하나를 물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세하. 어머니로부터 일상적인 활동에는 위상력을 쓰지 말라는 절대적인 명령이 있었던 탓에, 사이킥 무브 두세번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학교를 뛰어서, 버스를 타서 가야하는 불편함이 있다. 그래도 그렇게 허겁지겁 뛰어가다보면 길을 걸어가면서 왁자지껄 떠드는 같은 학교 학생들, 매일 아침 애완견과의 산책을 즐기시는 머리 벗겨진 배불뚝이 아저씨, 아침 잠이 덜 깬 채로 베란다에 걸어놓은 빨래를 걷고 있는 젊은 부부의 모습을 볼 수...

- 빨리 빨리 비켜! 나 시간 없다고오!

있을리가.

늘 아침 조회시간에는 늦지 않았던 세하지만, 간밤의 2연속 악몽 소동으로 잠이 왕창 부족했던 세하는 그대로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녹다운이 되어버렸다. 물론 뒤에 있는 석봉도 녹다운이 되기 직전인 상태로, 그렇지만 혼과 열정을 담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 세하야, 무슨 일 있었어?
- (힘없는 목소리로) 야, 말도 마... 어제 새벽에 꾼 악몽 때문에 잠을 다 설쳤어...
- 뭔... 꿈이었길래 그래...
- 으... 지금은 얘기할 상황이 아냐...
- 알았다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잘도 웅얼대며 대화를 하는 둘의 옆을 귀찮다는 듯이 지나가는 그림자. 바로 어제 C반에 새로 온 나타였다. 하지만 나타가 등장하던 말던 석봉은 그저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세하는 나타의 움직임을 느끼고 온통 피곤한 와중에도 그 새벽 악몽의 여파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타는 세하가 움찔하던 말던 전혀 신경도 안 쓰고(쳐다봤는지도 모른다) 석봉의 뒷자리로 앉아 하릴없이 창문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잠시 뒤에 들어오신 담임선생님도 조회 중에는 애써 나타 쪽을 좀 피하시는 눈치셨다. 아무래도 심정적으로 꺼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어제의 일도 그렇고, 간밤의 악몽도 신경쓰인 탓에, 세하는 아침 내내 나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리도 그런 악몽을 꿨었는지 알 방법은 없지만, 계속해서 나타를 향해 시선이 왔다갔다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유리도 나타를 신경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세하와 유리의 은근하고 열렬한 관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타는 오전 수업시간 내내 책과 필기도구를 책상 위에 대충 얹어놓은 채 귀찮다는 듯이 수업을 바라보거나 창문을 바라보는 식이었다. 창문 밖에는 매 체육시간마다 각 반이 돌아가면서 체육 수업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점심시간이 되고 학생들이 줄지어 교실 밖으로 나와 급식실로 향했다. 매번 그렇듯 온 건물이 진동하는 점심시간이었지만,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나타는 교실에 앉아있었다.

- ...나타
- 왜? 버러지.
- ...그 버러지라는 말 안 쓸 수는 없냐
- 버러지한테 버러지라고 하는게 뭐?
- ...너 밥 먹으러 안 가냐
- 귀찮아. 별로 먹고 싶은 마음도 없고,
- ...그래도...
- 맛 없어
= (세하, 유리) 핵공감

갑작스러운 공감대가 형성된 셋이었다. 이 때 2학년 E반의 이슬비가 같은 교정 내에 있는 초등학교 6학년 미스틸테인을 챙겨서 C반 교실로 들어왔다.

- 어? 나타형 여기 계시네요?
- 뭐야 꼬맹이.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
- ...우웅... 형 저 미워요?
- (심쿠궁) ...크흠, 귀찮게 하지 말고 가라고 했을텐데
- 나타, 테인이한테 너무 뭐라하지 말아줘. 지금 점심시간이야. 급식실로 이동해서 점심 먹자.
- 안 먹어.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맛 없어
= (슬비, 테인) 핵공감

왠지 모르게 교실 안의 다섯명이 같은 공감대를 가지게 되었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던 사이, 유리가 결심을 굳힌 듯 나타의 손목을 붙잡아 끌었다.

- 뭐, 뭐야? 이 고깃덩어리가?!
- 자, 자! 그만 심각하자구. 급식실 밥 맛 없는거 다들 알았으면 대신 뭐라도 먹어야하지 않겠어? 매점 가자! 그래도 여기 나타가 온지 이틀째 되는 날인데,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서로 같이 한 것도 없잖아? 빨리 가자구!
- ...어, 어 그래. 매점이라도 가자. 나타, 오케이?
- 그래요 형! 정 맘에 안 들면 매점도 좋죠!
- ...짜증나니깐 그만 좀 해! 귀찮다니깐 그러네...
- 아무리 귀찮다고 점심을 거르고 넘어갈 수는 없는거잖아. 이왕 유리가 결심한 김에 다같이 매점에 가는 걸로 결정하자.
- 좋았어! 역시 우리 리더답게 단결이 빠르다니깐!
= (세하, 슬비) 어이... 그거 결단이라고 하는거 아냐?

점심에 대한 얘기가 오가는 사이 세하는 나타의 동향을 힐끗힐끗 보고 있었는데, 확실히 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분명 먼저 날아왔어도 날아왔어야할 짜증 섞인 공격이 아닌, 그저 귀찮다는 식의 말대꾸 정도만 하고 있었고, 유리가 팔을 잡아당기는 상황에도 그렇게까지 저항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 진짜... 좀 다르려는걸까?

온갖 나타에 대한 의문을 안고 세하는 검은양 멤버들(+나타)과 매점을 방문했다. 원칙적으로 초등학생들은 매점 이용을 못 하게 교내에서 규제하고 있었지만, 미스틸테인은 독일에서 온 탓에 급식실에서의 식사가 입맛에 잘 안 맞는 경향도 있어서 눈감아주고 있었다.

- 어? 이거 우리 아니에요 누나?
- 음... 그러네? 저번에 얘기했던게 이건가보구나. 검은양팀 전원을 모델로 해서 만든다고 했던게 이거였...던건가?

매점에 가보니 신제품이라고 나온 빵들이 있었다. 얼마 전 검은양 멤버들을 모두 불러모아서 스튜디오에 데려다가 모델로 찍어서 내겠다고 하던 상품인가보다. 그 때는 다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찍었던 사진들이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호기심이 들면서도 서로 민망한 모양이다.

- 이게 뭐야, 왜 내가 모델인 빵은 게임기랑 똑같이 생겼어? 이거 너무한거 아냐?
- 슬비 너는 머리색 따라서 딸기맛 미니크림빵이구, 나는... 뭐야? 그냥 왕찐빵같이 생겼는데 이거?
= (슬비, 빠직)
- 그건 그렇고... 제이 아저씨꺼는... 빵마저 왜 이렇게 음산하냐?
- 세하형! 이거 왠지 모양부터가 못 먹을 것 같아요...
- 그... 그래, 일단 이거는 다음에 한 번 먹어보는걸로 하자... 나타, 너도 뭐 먹을래?
- ......(부스럭)

여전히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나타는 게임기 모양의 이세하 모델 빵을 하나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계산대에서 혼자 계산을 하고는 매점 구석 원탁에 앉는 것이다. 이제 막 학교에 오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시선이 거슬리고 신경쓰인다는 행동이 역력했다. 뭔가 답답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세하와 검은양 멤버들은 빵과 우유를 하나씩 사들고 나타가 있는 원탁으로 향했다.

- ...에이, 나타! 그렇게 혼자서 허겁지겁 사서 들고 가면 어떡해. 같이 먹기로 했으면 같이 사야지. 안 그래?
- 음...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유리야. 그래도 같이 앉아서 먹으면 괜찮은거지 안 그래?
- 나타 형도 초콜릿 좋아하시나보다! 저도 그 빵 샀는데.
- 음... 이 빵 딸기 맛이 뭔가 심심한데... 뭔가 빠진 기분이야.
- ...(우물우물)

평소같으면 서로 웃고 떠들고 있을 검은양팀이었지만, 나타가 끼어들어오면서 원탁에 잠깐의 대화 후 깊은 정적이 자리했다. 그렇게 서로 빵을 몇 입 먹던 중. 나타가 빵을 먹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모두 놀라서 나타를 보고 있는데, 일어나 세하를 쳐다보고 있는 나타의 얼굴에 분노가 뒤섞인 듯한 짜증스러운 표정(그러니까 평소에 볼 수 있었던 표정보다 더 강한 짜증이 묻어나는)이 가득했다. 그리고는

- 워억?

갑자기 세하의 입에 게임기 빵을 쑤셔넣고는 열린 창문을 통해 사이킥 무브로 교실로 향하는 나타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멤버들이 모두 C반 교실로 급히 뛰어들어갔지만, 이미 나타는 자기의 짐을 모두 챙겨 학교를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따가운 햇살이 비추는 교실, 창문 밑 벽에 드리운 그림자가 더 짙게 눈에 띈다.

- 3화에서


Posted by SamMak
,

나타의 소개가 끝나고 1교시가 시작하기 전, 교실을 급히 빠져나온 세하는 복도 끝 화장실로 달려가면서 전화 한 통을 걸었다.


그리고 그 무렵, 국가차원관리부 특수처리반 검은양팀의 관리요원 사무실

- 아, 됐으니까! 지금 좀 바빠요. 그동안 있었던 밀린 일들이 태산이라구요 태산! 커피나 한 잔 여유롭게 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구요. 네? 30번이 지금 여기서 왜 나와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강남 일대가 쑥대밭이 되면서 제가 했어야할 일이 그동안 올스탑 상태였던거 아시잖아요? 할 말이 있어도 좀 나중에 해주세요 지금 바쁘니까. 아흐!! 좀 그만 좀요 지부장님! 끊을게요 이만. (철커덕) ...에휴 내 팔자야 ㅜㅜㅜ

늘 그렇듯, 샐러리맨 아닌 샐러리맨 같은 김유정의 하루는 고되고 지쳐가기만 하는 일상이다. 온갖 다크포스를 뿜어내는 서류더미 속에서 수많은 강남 사태에 관한 검은양팀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고 보고하기 위해 눈코뜰 새 없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지만, 아무리 본인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 발휘해도 감당할 수 있는 선이 있고 없는 선이 있는 법이리라. 사무실 한 켠의 창문은 커튼이 쳐져 있어서 간신히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희미한 빛만이 사무실 바닥을 비추고 있었고, 책상 위의 스탠드는 언제 꺼져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참 오랫동안 열심히 김유정의 책상 위를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 (벨소리 -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고 있는 천춘인 줄 알았는...) 네, 관리요원 김유정입니다.
- 유정 누나!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 어, 세하야. 왜 그러니? 지금 누나가 많이 바쁜데?
- 아니 지금 우리 반에 나타가 왔다고요!
- 응? 낙타? 낙타라고?
- 아니 낙타 말고 나타요 나타! 우리 학교에서 작전할 때 공원 쪽에서 만났던 그 처리부대놈이요!
- 응? 뭐, 뭐라고?! 아니 걔가 왜 거기에 있어야 하는거지? 처리부터 소속이면 대외적으로 눈에 띄는 활동은 불가능하도록 제약이 모두 걸려있을텐데?
- 그러니까 제가 전화해서 누나한테 물어보잖아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구요! (그래요 언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줘요!)(야 서유리 여기 남자화장실이야 너 여긴 또 왜 들어왔어!)
- (......) 잠깐만 기다려봐 세하야 지금 잠깐 짐작가는데가 있거든?

유정은 그 즉시 사무실 전화기를 들고 지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뜌루르르르르, 철컹) 네, 신서울 지부장입니다.
- 지부장님!
- 아 그래 유정씨. 드디어 맥주 한 잔 할 여유가 생긴겐가?
- 아니요! 그럴 여유는 애초부터 없었다구요. 물어볼게 하나 있으니 빨리 대답해줘요.
- 뭔데 그러나?
- 지금 세하한테 연락이 왔는데, 세하네 학교에 나타가 들어갔다는게 무슨 얘기죠? 아까 뭔가 저한테 말씀하려고 하시던게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설마 이건가요?
- 그러니까, 며칠동안 유정씨가 계속 바쁘다고 해서 내가 말할 타이밍을 자꾸 놓쳤단 말야. 너무 그렇게 단칼에 자르고 그러면 내가 뭘 어떻게 자네에게 전달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나.
- ...아 알겠다구요. 그러는 지부장님도 좀 상대방을 배려해서 얘기해줄 순 없으신거에요? 계속 차 한 잔, 커피 한 잔 하자고만 말씀을 하시는데 안 그래도 바쁜 상황에 진절머리 날 것 같다구요! ...어쨌든, 설명 좀 해줘요. 무슨 상황이에요 이게?
- 알겠네 차근차근 설명하겠다고. 일단 좀 진정하고 심호흡 좀 해. 짧지만 중요한 내용이라고.
- ...
- 일단, 나타가 세하와 동갑인 젊은 소년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을테고, 나타군의 행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전해들은 얘기가 있을걸세. 그렇지?
- 네, 대충은
- 일단 나타가 정신병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하고 있네만, 과거에 있었던 그 살해사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광범위한 의문이 남아있었던게 사실일세. 그래서 먼저 1차적인 수습을 진행하기 위해 벌처스의 처리부대에 나타가 넘어가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그렇게 격한 활동은 자제하도록 애기를 해놓았었네.
- 그래서요?
- 최근에 나타군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던 중, 나타군이 어떠한 생명의 위협까지 느낄만한 외압에 의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었고 이에 우발적이고 계획되지 않은, 하지만 그 외압을 넣은 자에게는 철저히 계획된 잔혹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었다는 결과가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네. 나타군은 자신이 사람을 죽인 살인범으로 낙인찍혀 평생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그간 검은양팀을 위협하는 말과 행동을 많이 했었지만, 이렇게 된 내용을 나와 유니온 측에게 나타군을 만나 얘기하고 설득한 끝에 어느 정도 그의 마음을 되돌리는 데는 성공을 해놓았네. 다만, 약간의 상처가 그 가운데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 ...알겠ㅇ... 뭐라고요? 상처라뇨?
- 아, 별거 아닐세. 그저 그가 내지른 주먹을 반사적으로 팔로 막으려다 약간의 골절이 있었는데, 뼈가 붙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대외활동은 자제하고 있는 편이기는 하지만...
- 그럼 지부장님은 괜찮으신거에요?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직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상태일텐데 그런 아이를 대뜸 학교로 몰아넣다니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거에요?
- 자자, 우리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말이네. 유정씨 자네는 나타군이 위험한 행동을 할 상황이 될 때쯤이면 그가 착용하고 있는 제어장비가 작동해서 수시로 전기적 충격을 준다는 건 알고 있을테지? 일단 아쉽게도 그 방법을 지금도 쓰고 있다네. 아마 나타군에게는 좀 괴로운 일일거야. 아직 그가 이러한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으니까. 그래도 주변 학생들에게 그런 사실이 대놓고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교복 속으로 장치들을 숨겨주는 작업을 했네. 조금 불편하겠지만 그가 감수해줘야할 부분이기도 하지. 지속적으로 심리 치료 및 상담도 병행하고 있고, 우리는 그가 약간의 불편함이 있을지라도 사회로 정상적으로 돌아올 수 있는 도움을 주기 위한 하나의 '작전'을 진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네.
- ...아이들은요? 나타에게 다치고 마음의 상처를 받은 아이들은요?
- 그 정도는 일단 자네에게 맡겨주고 싶은데 어떤가? 우리 신서울 지부에서 검은양팀 관리요원인 김. 유. 정. 이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아주 높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텐데 말이지. 지금까지 보여준 능력만으로도 그 검증은 충분하다고 생각되네. 이번에도 그들을 잘 이해시키고 협력하게 할 수 있을걸세. 누구나 그렇듯, 나 또한 자네를 믿으니까.
- ...그렇지만 이건 너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 유정씨, 자네가 그동안 아이들과 함께 부대끼고 어울리면서 느낀게 있지 않나? 아이들은 순수해. 티없이 맑지. 우리들은 그 아이들에게 그동안 상처만을 강요해왔네. 부끄러운 일이지. 나타에게도 그런 아픔이 있고 과거가 있는거라고. 그들이 상처 받은만큼 감싸 안아줘야할 의무가 우리 어른에게 있다고 생각되지 않나? 이번 작전이 성공한다면, 나타군 뿐만 아니라 검은양 팀에게도 작은 변화와 치유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네. 만약 실패한다고 해도, 나타군에게 돌아갈 곳이 없는 건 아니지만, 후자의 경우보다는 전자의 경우가 난 더욱 더 희망적이고 보람있는, 마음의 빚을 내려놓을 수 있는 기회가 될거라고 생각하네. 자, 앞으로 검은양팀과 잘 협력해서 필요한 부분을 채우고 부족한 건 내게 얘기해주게. 이번 작전에 대해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할 준비는 되어있으니.
- ...
- 아 그래 좋아, 이 작전의 이름을 정하지 않았군. 음... 일단 이렇게 해두는걸로 하지. '늑대개 길들이기' 작전으로.
- ...알겠어요. 이만 끊을게요.
- 음, 필요한 내용은 다 전달한 것 같으니 휴식 차원에서 잠시 차나 한 ㅈㅏ... (털컥)

그 날, 하교를 마친 검은양팀의 동아리방

- ...네? 뭐라구요?!
- 그래 그렇게 된거야. 일단 너희들이 잘 도와줘야겠다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구나. 도움이 필요하거나 긴급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얘기해. 나타가 학교에 다시 오게 된 것이 너희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아. 하지만 그런 말도 있잖니?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말이야. 일단, 잘 부탁한다는 말 외에는 아직 특별히 해줄 수 있는게 없구나.
- (......후)

동아리방이 잠시 정적에 잠긴다. 유리마저도 조용히 심사숙고하는 모습이다(라고 해봤자 ㅇㅁㅇ...). 그리고 잠시 뒤에 슬비가 입을 열었다.

-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당장 우리 팀이 나타를 학교에서 반갑게 맞아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혹시라도 충돌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거죠? 중요한 건 그 곳은 우리 같은 위상능력자들이 있는 곳이 아닌, 그저 평범한 학교 중 하나라는 거에요.
- 일단 그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제어가 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건 확인시켜주고 싶구나.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을 경우 그 가능성부터 차단할 수 있는 준비는 해놓은 상태란다. 그리고 나타에게는 지속적으로 도움이 가고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그런 문제는 거의 발생하지 않을 수 있을거라고 지부장님은 생각하고 계셔.
- 하지만 그건 생각일 뿐이라구요! 슬비도 유리도 테인이도 제이 아저씨도(제이- 아 난 괜찮아 괜찮은데 그 아저씨는 좀 어떻게 뺄 수...) 다 그 놈한테 다치고 위협받은게 있는데 무턱대고 이런 식으로 우리와 붙여버리면 어떻게 하라는 거에요? 어제 테인이가 그 소식을 전해듣고 알게 모르게 불안해하는게 눈에 보였단 말이에요.
- ...그래 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 그렇지만, 나타도 너희들 또래 위치에 있는 아이이고, 앞서 설명했던대로 충분히 기회를 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너희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반영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런 작전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해주길 바라는거야.
- 하... 하지만!
- 그 정도면 된 것 같아 세하야. 유정 언니. 일단 무슨 뜻으로 이 작전이 진행되는지는 알 것 같아요.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이 일로 검은양팀 내부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거라는 약속. 확실히 해주세요. 나타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도움은 줘야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흔들리는 일은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 정도는 받아주실 수 있는거죠?
- 그래, 물론이야. 나도 너희들이 더 이상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아니니까. 근데 아까부터 유리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니? 그렇게 생각만 하다가 졸거나 그러ㄴㅡ... 응? 너 설마... 조는거니!?
- (으웅)아, 아니에요! 안 졸았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나타랑 잘 놀아주면 된다는 내용인거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팀원들이 나타 걔 때문에 다치고 그러면 또 어떡해요? 게다가 난 아직 그 놈이 날 갖고 고깃덩어리니 뭐니 했던 그 말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구요!
- (...;;;)그러니까, 그런 일이 없도록 약속하겠다고 방금 얘기를... 했단다;

라고나 할까

그래서 나타는 우여곡절 끝에 검은양팀의 이해를 받아 본격적으로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더라.

- 2화에서


Posted by SamMak
,
싱그러운지 아닌지 모르겠는 햇살이 내리쬐는 아침, 주방은 학교를 가야할 아들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어머니의 분주함으로 가득하다. 매일 돌아오는 아침이 뭘 그리 특별하겠냐마는, 어머니에게는 오늘 아침 아들의 시작을 무엇으로 열어줄지에 대해 고민하는 의미있는 일과 중 하나인 것을.
바쁜 주방일을 하시던 어머니가 등 뒤에 있는 시계를 보고는 아들의 방에 한 마디 쏘아붙인다.

- 세하야, 안 일어나니?

물론, 응답이 있을거라 기대한 적은 최근 몇 년새 단 한 번도 없다. 늘 그랬듯 아침 기상시간은 전쟁이었으니까.
문을 열어젖히고, 늘 비슷한 자세로 엎어져 누워있는 아들을 만난다. 한 손에는 게임이 아직 켜진채 배터리 충전기가 연결된 게임기가 포근하게 안겨있었고, 얼굴은 베개에 엎어진 채 미동도 없이 잠들어있었다.
늘 똑같은 아침 풍경, 그리고 늘 똑같은

- 이. 세. 하! 안 일어날래!?

'꿈틀', 그제서야 서서히 꿈틀대는 모습이다. 새벽 내내 무엇을 했을지 뻔한 상태인데 어느 어머니가 이런 고함소리 한 번 안 치고 넘어가실까.
조금의 움직임을 보이던 이세하가 다시 침대를 정적으로 만든다. 이것도 역시나다. 한 번에 일어나는게 기적일 뿐. 그리고 이어지는 맑고 청량한

- 짝!
- 아악!

세하 어머니는 등짝 스매싱을 날렸다! 어머니의 트루 데미지 효과는 굉장했다!
잠결에 꿈틀대던 몸뚱이가 벌떡 일어나는 것이다. 늘 비슷한 기상 패턴이지만 단 하루도 익숙해질 수 없는 아픔은 세하가 아침을 상쾌하게 시작하기를 방해하는 불편한 점 중 하나다.

- 일어났으면 아침 먹고 학교 가.
- (하품과 함께) 후아암... 네.

반쯤 뜬 눈으로 아침을 먹고 씻고 가방과 게임기를 챙겨 세하는 등교길에 오른다. 어제까지만 해도 줄기차게 쏟아지던 빗줄기들이 새벽 사이에 다 잠잠해지고 맑은 하늘이 드러났다. 등교길 여기저기에 있는 웅덩이에 비치는 햇살이 이세하의 졸린 눈에 수시로 묠니르를 꽂는 느낌이다(물론 당사자는 그게 무슨 느낌일지 잘 모를테지만). 항상 졸음과 싸우면서도 지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지각이라도 했다간 부모님께 연락이 가는게 기본이고, 그 다음은...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몰려오는 피곤과 졸음을 견뎌내고, 어떤 상태로 걸어나갔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2학년 C반 교실에 도착한 이세하. 잠시 두리번거려보니 역시나 서유리는 오늘도 늦는 모양이다. 창가의 자기 자리로 도착해 뒤를 돌아보니 피곤에 찌들어 충혈된 눈과 다크서클을 가진 다크포스의 한 사내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게임기를 붙잡고 있었다.

- 후아암... 석봉아 안 피곤하냐?
- 어음... 아니야 지금 이 정도면 괜찮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 (힐끗) 너 벌써 여기냐? 야 너무 혼자 달리는거 아냐?
- (축 처지는 목소리로) 그거야 네가 같이 던전을 돌다가 갑자기 자버렸으니...까...
-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넌 게이머들의 귀감이야.

여느 날처럼 별다를 바 없는 하루다. 간간히 차원종 습격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지만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피라미같은 놈들이나 가끔 등장한다고 한다. 당장은 클로저라 해도 나설 필요도 없고 나설 생각도 없다. 너무... 힘들었다고나 할까.

그동안 있었던 일련의 수많은 사건들을 지나보내고 나서, 세하는 한층 더 성숙(한 게임 실력을 보유)해졌다. 신서울 전역을 누비며 수많은 차원종들을 맞닥뜨린 탓에 한동안 피곤에 찌들어 지쳐있었지만, 그래도 금방 회복해서 했던 첫 일이라곤... 역시 게임이었다.

= 그래도 좋잖아? 열심히 차원종 레이드 한 공로도 인정받아 돈도 많이 받았으니 게임에 더 투자해야지!

당연스럽게도... 지당한 생각이었다.

- 자, 다들 앉아라.

왁자지껄하던 아침의 교실이 우당탕 소리와 함께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C반 담임선생의 등장이다.

- 오늘도 아침부터 다들 한바탕 하느라 정신 없는거냐? 엉? (드르르륵, 쾅! 우당탕탕!) 야 서유리! 넌 지금 늦게 오는 것도 모자라서 왜 아침부터 난리법석이야? 책상 부서져 임마!

그럼 그렇지 싶은 순간이다. 왜 서유리가 교실에 없나 했더니 당연히 지각이다. 위상력에 눈 뜬 뒤 클로저로서 수많은 작전을 펼치고 전장에서 살아돌아왔지만, 주체할 수 없는 10대의 혈기는 늘 여전해서 저렇게 가끔 감당하기 힘든 사고를 친다. 이미 교실 바닥에 발자국이 푹 패인 자국을 보자하니 그걸 바라보던 이세하는 한숨부터 나온다. 나뒹군 책상 몇 개를 서유리가 급히 주워서 정리한다.

- 또 교실 난장판으로 만들고 지금 뭐하는거야? 그러고도 클로저야? 고생했으면 고생한만큼 보람이라도 있어야지 이렇게 힘 조절이 안 돼서야 원...
- 죄송해요 선생님! 그치만 오늘 너무 피곤해서 늦잠을 자는 바람에 급하게 달려오느라 그런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구요.
- 에휴 됐다 됐어. 너 늦잠자고 지각하는게 하루 이틀이냐? 어찌된게 클로저가 되기 전이나 되고 난 후나  달라진게 없냐 너는. 자 됐고 다들 앉으면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그런 줄 알어.

가벼운(?) 서유리의 지각 소동 이후로 담임선생은 이 말을 남긴 뒤 다시 교실 밖으로 나갔다. 또다시 교실이 웅성웅성해지는가 싶더니, 담임선생이 누군가를 데려오...는데

- (?!?!) 어엇? 너는?
- (?!?!) 야 뭐야! 너 여기 왜 온거야 너?!

세하와 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 순간 그가 여기에 있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깊이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자기네 또래였을 것이라는 건 처음의 만남을 통해서 대충 짐작은 했었는데, 그렇다고 이런 장소에서 이런 신분으로 같이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단 한 순간도 생각해보지 못한만큼,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 자, 너희 둘은 조용히 하고, 자기소개부터 해라.
- 나타라고 한다. 불만있나?
- 학생, 말 좀 곱게 쓰라고 부탁했잖냐.
- 왜? 내가 내 인사 하겠다는데 왜 신경 써.
- (...고개 돌리며) 하아...

담임선생도 한 숨이 절로 나올만큼 당혹스러운,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애들은 영문도 모르겠다는듯이 나타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세하와 유리는 교탁 앞에 서있는 저 단정한 교복차림의 삐친머리 소년을 입이 멍하니 벌어진채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공원에서의 악연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싶다. 같은 클로저인 자신들의 목숨마저 위협했던, 적으로 만났던 자를 교실에서 학교 친구(?)라는 위치로 만나게 되다니, 도대체 유니온과 벌처스는 이 범죄자를 어떤 목적으로 이런 무방비한 교실에 던져놓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당췌 이해할 수 없었다.

나타는 간단한 자기소개 이후 누구에게도 관심 없다는 듯이 흘기듯 교실을 둘러봤다. 그리고 세하와 유리가 붙어있는 자리쪽을 보더니 둘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닌가? 세하와 유리는 동시에 돋아오르는 소름을 느꼈다. 다만,

= (세하, 유리)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전에 대공원에서 만났던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나타의 위상력도 비교적 안정돼있는 상태였고, 비록 상황에 따라 급변할 수 있다고는 해도 지금 당장은 그 전에 보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약간 차분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세리둥절 유리둥절 하는새 간단한 소개가 끝나고 나타의 자리가... 비어있던 석봉이의 뒷자리로 결정나버렸다.

= (세하, 유리) !!!!

교실 창가 옆 나무에 앉아있던 새 한 마리가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평화로운 교실에 점점 알 수 없는 음습함이 찾아들고 있었다.



- To be continued


Posted by SamMa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