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로서는 굉장히 곤란할 수밖에 없다. 동물이라고는 전혀 관심도 가지지 않는 나타의 집에 들어와있는 고양이 한 마리. 평소같았으면 당장에 밖으로 내다버리고 하고 싶은 휴식을 마음껏 할테지만, 왜인지 이 녀석 앞에서는 머릿속으로만 움직일 뿐 몸이 반응해주질 않는 것이다.
어느 날엔가 집에 돌아온 나타가 발견한 것은 집 문 앞에 놓인 작은 상자. 그리고 그 상자 속에는 귀여운 검은색 양의 얼굴이 그려진 쿠션에 기대 곤히 잠든 어린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고, 그 옆에 있었던 쪽지 한 장.
'세냥이라고 해요. 귀여운 아이 잘 부탁드릴게요!'
"...어떤 녀석이 또 이딴 버러지같은 걸 나한테 내버린거야?!"
짜증이 잔뜩 솟구친 나타는 홧김에 집밖으로 세냥이를 내던져버리려 했었다. 그리고 박스를 들어올리면서 조그만 자극에 예민하게 눈을 뜬 세냥이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마주친 그 순간부터의 일련의 기억은 없지만, 다시 기억이 나는 순간부터 짚어보자면 어느새 세냥이가 나타의 집에 눌러앉아있었고, 아무리 얘를 밖으로 내쫓아버리고 싶어도 나타는 도저히 그걸 실행에 옮길 수 없겠더라는 것 정도가 되겠다.
'젠장, 이 버러지같은 고양이 녀석을 어떻게 처리한담... 레비아한테 좀 떠맡겨 보려고 해도 진절머리를 냈단 말이지...'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답이 나오질 않는 것이다. 그렇게 소파에 앉아 한참을 궁리하던 나타의 곁으로 세냥이가 약간씩 휘청휘청하면서 조심스럽게 걸어왔다. 그리고 나타가 신경쓰지 않는 새 은근슬쩍 나타의 허리춤 곁에 앉아 갸르릉거리면서 얼굴을 부비는 것이다.
"...뭐야 이 버러지 자식은. 저리 안 가?! 썩 꺼져 좀 귀찮으니까."
세냥이가 기대는 것에 거부감을 드러내면서 있는 힘껏 몰아내는 나타. 세냥이도 지지 않고 몇 번을 더 들러붙으려고 시도해봤지만, 나타의 저항이 워낙 거센 탓에 더 이상은 불가능했다. 뭔가 잔뜩 시무룩하고 토라진 듯한 세냥이가 나타가 앉은 소파 구석으로 가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쪼그려 앉았다.
그렇게 나타로부터 세냥이가 멀어진지 얼마쯤 됐을즈음, 내일의 할 일을 하나하나 따져보던 나타의 눈에 아직도 웅크린 채 앉아있는 세냥이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잠시 지켜보니 세냥이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잠시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대로 뒀다간 서로 귀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에 나타는 세냥이에게 잠시 접근해본다. 하지만 토라진 듯한 세냥이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웅크린 채 나타를 보며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경계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더 이상의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는 세냥이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나타는 억지로 세냥이를 끌어다가 무릎 위로 앉히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거센 저항의 발톱질 때문에 조금씩 몸에 스크래치가 나는 것이다. 그다지 아플 건 없지만 기분이 꽤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타는 결국 (마음 속으로는 저 밖으로 이미 백번은 집어던졌지만) 세냥이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았다. 아직도 원망 섞인 세낭이의 표정을 보면서 처치곤란한 상황에 놓인 나타는, 결국 자리를 잠시 벗어나 어쩔 수 없이 안 되는 능력으로 낑낑대면서 인터넷을 통해 세냥이를 달래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미야아오...?"
나타의 손에 들린 것은 집에 돌아다니는 옷걸이를 펴서 만든 막대기에 매달린 조그맣고 귀여운 검은색 양 인형이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나타는 왼다리를 꼰 채 왼손으로 턱을 괴고는 오른손으로 그 막대기를 고양이의 눈가에 휘적휘적하기 시작했다. 매우 무성의하게 쳐다보지도 않은채 하는 휘적휘적이라 가끔 세냥이의 얼굴에도 툭툭 닿기도 했지만 세냥이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이, 비록 경계하는 꼬리는 빳빳했지만, 그 눈은 검은색 양 인형을 필사적으로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만 움직이던 세냥이는, 어느새 서서히 앞발을 내밀어 양 인형을 낚아채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무심한 척 흘겨보고 있던 나타도 아닌 척 세냥이에게 쉽게 인형을 주지 않기 위해 좀 더 정교하게 신경쓰는 휘적휘적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 소파 위는 검은양 인형을 두고 벌이는 쟁탈전의 장이 된 것이다.
"미야아오옹!!"
아슬아슬하게 인형이 세냥이의 손을 벗어날 때마다 점점 그 반응과 소리가 격렬해지기 시작했고, 무슨 승부욕이 발동해서인지 나타도 그에 맞게 더욱 더 절묘한 컨트롤로 세냥이를 놀려주기 시작했다. 이윽고 세냥이는 앞발과 몸통 뿐만아니라 온 몸을 일으켜 양을 쫓기 시작한 것이다.
나타는 슬쩍 막대기를 들고 있던 오른손을 뒤로 빼서 반대쪽으로 인형을 끌고 갔다. 세냥이도 움직인 인형을 따라 와락 나타의 품을 넘어서려는 순간,
"잡았다 이 버러지. 녀석 더럽게도 말 안 듣는구만."
나타는 괴고 있던 왼손을 풀어 세냥이를 확 덮쳤다. 나타에게 붙잡히고도 인형에 정신이 팔려 한참을 발버둥치던 세냥이는 이내 나타를 천천히 바라보며 눈빛을 흘리는 것이다.
......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린 나타의 눈 앞에는 인형을 가지고 뒹구르르 구르면서 노는 세냥이가 눈에 들어왔다.
"...제기랄 내가 저딴 버러지한테... 후..."
짜증이 머리 끝까지 솟구쳤지만 그렇다고 그 화를 다 낼 수는 없었다. 이 망할 놈의 구속구 때문에 자칫 평상시에 화를 크게 냈다간 귀찮게 따가운 자극이 반복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나타가 온갖 귀찮음을 다 담아 세냥이를 쏘아봤지만, 인형과 뒹굴던 세냥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인형을 입에 문채 나타의 품으로 뛰어서 올라왔다. 잠시 인형을 놓은 세냥이는 온 몸을 부르르 떨면서 곧추 펴더니, 나타의 배에 손을 얹고 갸르릉거리면서 미약하게 꾹꾹 누르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타는, 귀찮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인형을 자기 옆자리에 놓고는 세냥이를 오른팔로 품어놓은 채 다시 다리를 꼬고 왼손을 턱에 괴는 것이다. 세냥이는 그렇게 해서 마련된 나타의 품에서 몇 번을 더 꾹꾹대며 갸르릉거리더니, 조그만 하품과 함께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별빛에 잠겨가는 하늘 아래, 달빛이 나타의 거실에 쳐진 커튼 사이를 틈타 서서히 빛을 들여보내는 시간. 조용한 소파 위 온갖 것이 귀찮고 짜증나는 나타의 품 안에 새근새근 잠든 세냥이.
누군가를 위해 준비된 어두운 지하 공간. 어떠한 외부 통로도 허락되지 않은 철저한 밀실. 허름하게 미세한 구멍이 난 벽의 틈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이 닿는 곳에, 거미 한 마리가 자신이 만든 거미줄을 손수 보수하며 뽈뽈뽈 바쁘게 거미줄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돌아다니는 쥐마저 죽은 듯이 조용히 방을 가로질러 근처에 있는 드럼통에 얼씬대는 음산한 분위기의 장소.
그리고
"쾅!"
어느 누구의 발걸음도 허락하지 않을 것같은 곳에 두 명의 소년이 들어왔다. 푸른 분노의 눈빛을 한 소년이 허옇게 질린 혼미한 표정의 소년을 질질 끌고 들어온다. 그리고,
"툭, 쾅!"
정신을 놓은 채 겁에 질린 소년이 내동댕이쳐지고, 문이 닫힌다. 다시 암흑이다. 그리고 잠시 뒤, 천장에 간신히 매달린 백열전구가 점등된다. 그 불빛 아래로 내동댕이쳐진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옷이 여기저기 찢겨진 채 몸이며 팔까지 이미 가득했던 흉터 위로 붉은 상처들이 드러나있었다. 평소에 보였던 짜증섞인 불만스러운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깊숙히 숨겨져있던 내면의 공포가 얼굴에 고스란히 비춰졌다.
"...자, 앉아보시지."
명령에 움찔했지만, 쓰러진 소년은 함부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저 압도적인 두려움에 벌벌 떨기만을 반복했을 뿐.
"앉으라고 했잖아! 왜 앉질 못 하는거야! 내가 무서운거야? 어?! 빨리 앉으라고!!"
온 방을 뒤흔드는 고함소리가 울리고서야 소년은 정신을 차렸다. 분명 도무지 이런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협이 농담이 아닌 진실임은 확실했다. 이런 상황에 수도 없이 던져본 경험이 있는만큼, 나타도 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맞섰다.
"이 버러지 자식이...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러는거야? 뭐야! 뭔데!"
"...자, 진정하고... 천천히 시작하자고, 나타. 넌 내게 분명히 말했어. 넌 날 좋다고 했어. 그래, 네 마음을 네가 말해줬어. 그래서 나도 받아줬잖아? 안 그래? 엉?"
눈을 바싹 붙인 채 휘몰아치듯 말하는 분노와 탐욕의 소년 앞에 나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타에게는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나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사건이 이 소년을 불타는 흥분에 사로잡히게 했는지... 도무지... 도무지 냉정하게 판단하려 해도 계산이 서지 않는 것이다.
"아, 그래. 너무 무서워하진 마. 당연히 널 해칠 생각은 없다는걸 잘 알잖아? 네가 날 좋아했던 만큼 나도 널 좋아해. 그래, 그건 사실이야. 네 마음은 지금도 변함은 없지? 그렇지? 그럴거라고 말 해!"
소년은 마지막 외침과 함께 나타에게 다가가 강하게 입을 맞추었다.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입맞춤보다 불타는 것이리라, 나타는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푸른 불꽃을 가진 소년이었으니, 지금같이 흥분한 상태에서는 또 어떠겠는가? 위상능력자가 아닌 사람이 그에게 다가갔다간 바로 격렬한 화상을 입을만한 상황이었다.
잠시 굳어진 채 소년의 기습을 받아야했던 나타는 그대로 세하의 제어되지 않는 위상력과 바등바등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그리고 영원같은 짧은 순간이 지나고,분노의 소년, 세하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지는 듯한 분위기였다. 세하는 나타를 등진 채 뒤로 돌아서 몇 걸음을 걸었다. 잠시 이 상태를 진정시키는 소강상태인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같은 위상능력자로서의 나타는 느낄 수 있었다. 알파 퀸의 아들, 바로 그의 앞에 서있는 이세하로부터, 그동안 어느 누구로부터도 경험할 수 없었던 강대한 위상력의 흐름이 있음을. 그리고 그로 인해, 이 방에 있는 본인이 심각한 위험에 처할 것임을.
"나타..."
"......"
"...나타!!"
"ㅇ..왜 부ㄹ...부르는거냐?"
"너... 너 기억해?"
"...뭐...뭘 말이냐?"
"너... 내 꿈에... 나왔었어..."
말을 하면서 등을 돌려서는 세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타는 숨이 멎는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힘이 그 몸 속에 잠자고 있었다. 그가 움직이는 순간, 나타는 무너져내려야만 할 것이다. 이 공간도... 온전할 수 있을까?
"너... 내 꿈에서... 나와 함께였어... 강렬했다고... 난 아직 기억하고 있어... 넌 어때? 어땠어? 그 짜릿했던 순간이 아직 네게 남아있어?"
"...그...그만 해! 버러지 자식 그건 꿈이었을 뿐이잖아! 왜 꿈을 지금 나랑 연결하려고 드는거야!"
"넌... 넌 나한테 지금처럼 해선 안 되는거야. 날 봐. 내 얼굴을 보라고. 내 눈빛, 내 숨결, 내 작은 움직임까지 놓쳐선 안 되는거잖아? 아냐?"
다시 백열전구 밑으로 들어온 세하. 산발된 머리 때문에 그 눈빛은 아직 가려졌지만, 나타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이, 마지막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것을. 자신은 한 번도 겪지 못했고 느낄 수도 없었던, 세하 본인만의 꿈 하나가, 지금의 끝자락으로 자신을 인도했음을 끝내 한탄하지 못할 것임도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냐? 아닌거야? 아니냐고! 넌 왜 그 때처럼 날 대해주지 못하는거야! 왜! 왜! 왜!!"
분노한 세하가 나타의 목을 양손으로 부여잡아 들어올렸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상황에 나타는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온 힘을 담은 압박에 나타는 공중에 뜬 채 자신이 가진 위상력으로 애써 저항하는 것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세하가 속삭였다.
"넌... 왜... 왜 이러는걸까... 꿈 속에서는... 이러지 않았다고..."
툭, 눈이 뒤집히는 생명의 끝자락에서 다시 되돌아왔다. 나타가 꺼억꺼억대며 고통스러운 목을 부여잡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너... 그러지 마... 넌 나를 봐야해... 넌 나와 함께여야만 한다고... 넌... 지금의 넌 너무 뜨겁지 않아..."
차가운 불꽃이 세하를 감싸고 돌았다. 냉정과 열정 그 사이, 둘 사이의 공간이 침묵에 빠진다.
잠시 말이 없던 소년은 안주머니에 있는 게임기를 자연스럽게 꺼내든다.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게임에 열중하려던 소년은, 이내 뭔가 집중이 잘 안 된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게임기를 품에 집어넣었다.
"...무슨 일이냐?"
"왜?"
"너답지 않게 게임기나 집어넣는게 말이다."
"그냥, 지금은 게임 하는거보다 이렇게 드러누워서 편하게 있는게 더 나은 것 같다."
"그러냐?"
무심한 소년의 마지막 멘트에 이어서 잠시 침묵이 이어진다. 시원한 바람이 무심한 소년의 코끝을 스쳐 평소답지 않게 게임을 하지 않고 있는 소년을 향해 흐른다. 잠시 근질근질했던 바람 탓에 재채기 소리가 들려온다. 무심한 소년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으면서 툭 던지듯 말을 건넨다.
"감기냐."
"음... 조금"
"게임만 하지 말고 이렇게 밖에 좀 나와라, 버러지 자식. 그러니까 그렇게 아픈거다."
"...지금 나한테 신경 써주는거냐 나타?"
"......"
나타라 불린 소년이 다시 침묵한다. 나타로부터 계속 버러지라 불린 세하라는 소년은 계속해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잠시 코를 훌쩍인다. 그렇게 다시 바람을 느끼며 누워있다가, 갑자기 무언가가 시야를 가리며 얼굴에 툭 떨어진다. 세하는 놀라서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황급히 그것을 얼굴에서 건져낸다. 늑대개 마크가 박힌 손수건이다.
"훌쩍일거면 코나 풀어."
"이거 손수건 아니냐?"
"그까짓 천조각은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그거로 해."
무심한 척 챙겨주는 나타에 그만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오는 세하.
"뭐냐?"
"아니아니, 그냥 잠깐 다른 생각 했어. 웃긴 생각."
"그까짓 천조각이 우습기라도 하냐?"
"아니, 아니라니깐?"
"...해결하면 다시 나한테 넘겨라.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잠시 나타 눈치를 보던 세하는, 나타가 준 손수건으로 코를 풀고난 뒤, 더러운 부분을 최대한 가려 나타에게 건넨다. 뒷주머니에 코 푼 손수건을 쑤셔박은 나타는,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 잠시 고민에 잠기다가, 뭔가를 흥얼거리던 세하를 향해 한 마디 툭 던진다.
"야 버러지,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
"...뭐...뭣? 뭐라고?"
"들은 그대로다. 다시 말하기 짜증나니까 빨리 대답이나 해라."
"...잠깐만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한다고 내가 바로 말이 나오겠냐?"
"......"
"음... 야, 그냥 좀 때 되면 티격태격하고 필요하면 서로 좀 불러내고 얘기도 하고, 서로 편안한 그런거 아니냐? 네가 원하는 말이 뭔데?"
"...버러지 자식. 네가 할 수 있는 말의 수준이 거기까지밖에 안 된다는 거냐."
"......? 어디가 어떻게 문제인데?"
"길게 늘여서 얘기하지 말라는 거다. 내가 어쩔 수 없이 머리가 나쁘단건 너도 알지 않냐."
"그럼 무슨..."
"'좋다'라는 이 한 글자가 그렇게 어려운거냐 네 입에서는?"
"......"
"그게... 그 말이, 그렇게 어렵냐는거다."
"......"
잠시 무심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던 나타가 세하로부터 등을 돌려 눕는다. 세하는 특별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나타의 이야기에 놀라 그저 멍청히 누워있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금은 잔잔해진 바람이 잔디의 내음을 몰고 오고, 엷던 구름이 천천히 흩어진다. 맑은 햇빛이 나무의 나뭇잎 사이를 뚫고, 누운 두 소년의 사이에 희미한 그림을 그려주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잔디밭 위에서 잠든 나타의 숨소리가 세하에게 들려왔다.
잠시 고민하며 주저하던 세하는, 나타 쪽으로 몸을 돌려서 등돌린 나타의 왼손을 끌어당겼다. 나타는 팔이 꺾이면서 불편하다는 신음을 냈지만, 별로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다시 몸을 돌려 누웠다. 수없이 거친 작전들로 성하지 않은 나타의 왼손을, 세하의 오른손이 포개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