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말이 없던 소년은 안주머니에 있는 게임기를 자연스럽게 꺼내든다.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게임에 열중하려던 소년은, 이내 뭔가 집중이 잘 안 된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게임기를 품에 집어넣었다.
"...무슨 일이냐?"
"왜?"
"너답지 않게 게임기나 집어넣는게 말이다."
"그냥, 지금은 게임 하는거보다 이렇게 드러누워서 편하게 있는게 더 나은 것 같다."
"그러냐?"
무심한 소년의 마지막 멘트에 이어서 잠시 침묵이 이어진다. 시원한 바람이 무심한 소년의 코끝을 스쳐 평소답지 않게 게임을 하지 않고 있는 소년을 향해 흐른다. 잠시 근질근질했던 바람 탓에 재채기 소리가 들려온다. 무심한 소년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으면서 툭 던지듯 말을 건넨다.
"감기냐."
"음... 조금"
"게임만 하지 말고 이렇게 밖에 좀 나와라, 버러지 자식. 그러니까 그렇게 아픈거다."
"...지금 나한테 신경 써주는거냐 나타?"
"......"
나타라 불린 소년이 다시 침묵한다. 나타로부터 계속 버러지라 불린 세하라는 소년은 계속해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잠시 코를 훌쩍인다. 그렇게 다시 바람을 느끼며 누워있다가, 갑자기 무언가가 시야를 가리며 얼굴에 툭 떨어진다. 세하는 놀라서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황급히 그것을 얼굴에서 건져낸다. 늑대개 마크가 박힌 손수건이다.
"훌쩍일거면 코나 풀어."
"이거 손수건 아니냐?"
"그까짓 천조각은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그거로 해."
무심한 척 챙겨주는 나타에 그만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오는 세하.
"뭐냐?"
"아니아니, 그냥 잠깐 다른 생각 했어. 웃긴 생각."
"그까짓 천조각이 우습기라도 하냐?"
"아니, 아니라니깐?"
"...해결하면 다시 나한테 넘겨라.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잠시 나타 눈치를 보던 세하는, 나타가 준 손수건으로 코를 풀고난 뒤, 더러운 부분을 최대한 가려 나타에게 건넨다. 뒷주머니에 코 푼 손수건을 쑤셔박은 나타는,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 잠시 고민에 잠기다가, 뭔가를 흥얼거리던 세하를 향해 한 마디 툭 던진다.
"야 버러지,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
"...뭐...뭣? 뭐라고?"
"들은 그대로다. 다시 말하기 짜증나니까 빨리 대답이나 해라."
"...잠깐만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한다고 내가 바로 말이 나오겠냐?"
"......"
"음... 야, 그냥 좀 때 되면 티격태격하고 필요하면 서로 좀 불러내고 얘기도 하고, 서로 편안한 그런거 아니냐? 네가 원하는 말이 뭔데?"
"...버러지 자식. 네가 할 수 있는 말의 수준이 거기까지밖에 안 된다는 거냐."
"......? 어디가 어떻게 문제인데?"
"길게 늘여서 얘기하지 말라는 거다. 내가 어쩔 수 없이 머리가 나쁘단건 너도 알지 않냐."
"그럼 무슨..."
"'좋다'라는 이 한 글자가 그렇게 어려운거냐 네 입에서는?"
"......"
"그게... 그 말이, 그렇게 어렵냐는거다."
"......"
잠시 무심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던 나타가 세하로부터 등을 돌려 눕는다. 세하는 특별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나타의 이야기에 놀라 그저 멍청히 누워있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금은 잔잔해진 바람이 잔디의 내음을 몰고 오고, 엷던 구름이 천천히 흩어진다. 맑은 햇빛이 나무의 나뭇잎 사이를 뚫고, 누운 두 소년의 사이에 희미한 그림을 그려주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잔디밭 위에서 잠든 나타의 숨소리가 세하에게 들려왔다.
잠시 고민하며 주저하던 세하는, 나타 쪽으로 몸을 돌려서 등돌린 나타의 왼손을 끌어당겼다. 나타는 팔이 꺾이면서 불편하다는 신음을 냈지만, 별로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다시 몸을 돌려 누웠다. 수없이 거친 작전들로 성하지 않은 나타의 왼손을, 세하의 오른손이 포개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