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소영
- 플레인게이트 스토리 스포 주의
참새가 짹짹거리며 우는 아침이 밝았다. 시계 소리가 잔잔히 귀를 간질이는 조용한 방 안에, 창문으로 비쳐들어오는 햇빛이 괴로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뒹굴거리고 있는 자취생 한 명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도저히 일어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 분위기에 그녀의 오늘 하루 일과마저 걱정이 되는 수준이었다. 피곤에 찌들어 뒹굴뒹굴하고 있던 그녀의 머리맡에 놓인 알람시계가 뜻모를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알람시계를 퍽 하고 꺼버린 뒤 이불에 다시 머리를 파묻어버렸다. 평소라면 그래도 알람 덕분에라도 일어났을테지만, 지난 밤 학기 초부터 떨어진 팀플지옥에 빠져 허우적댄 탓에 새벽내내 스트레스에 시달린 후유증이 나타나고 있었다.
"끄으응... 아우, 졸린ㄷ... 헙!!"
그렇게 얼마간을 더 뒤척이다가 간신히 눈이라도 뜬 소영의 눈에 보인 시계의 시각은 오전 10시 50분, 오늘의 첫 수업 시작시간 10시 30분을 한참 넘긴 가혹한 시간이었다. 순식간에 이불을 박차고 침대에서 일어난 소영은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가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물에 담아내듯 무서운 기세로 세면과 머리감기를 끝냈다. 그리고 나와보니 시간은 11시. 번개같은 속도로 씻기를 끝낸 소영은 그대로 화장도 거의 하지 않은 채 평소 집어입던 옷과 크로스백을 대충 걸치고는 자취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다행히 수업이 있는 건물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애초에 지각을 해버린 마당에 그런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싶다.
헐레벌떡 수업이 있는 건물 정문으로 뛰어올라간 소영은, 옆으로 스치면서 누군가 짜증내듯이 외치는 소리마저 들을 겨를 없이 그대로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서는 수업이 한창 진행중인 강의실로 뛰어들어갔다. 문을 살포시 닫고 조교에게 지각체크를 하고는 정해진 자리에 앉아서 숨을 고르며 책을 끄집어냈...
"...허억...?"
그러고보니 바로 그 팀플과제가 있던 수업이라 새벽까지 모든 힘을 쏟아부었던 탓에 크로스백에 그 책이 담겨져있었을리가 없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루의 일진이 처음부터 대차게 꼬여버리고만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냥 굴러다니던 공책 하나를 펴서 간신히 필기라도 따라갔지만, 애초에 지금 수강 중인 과목 자체가 이런 소소한 필기들로 따라가기에는 이미 글러버린 과목이라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던 소영이었기에 수업을 듣는 와중에도 집중을 제대로 못한 채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강의실 문에 달린 창문 밖으로 서성이는 검은 그림자의 존재는 눈치채지도 못한 채 어느새 수업 막바지에는 졸아버리기에 이르는 소영. 그런 그녀를 내버려둔 채, 수업이 어느새 끝나고 학생들이 짐을 챙겨 나가기 시작했다. 소영의 학교 동기들도 일어나 강의실을 빠져나오면서 소영을 쳐다보기야 했지만, 바로 그 날 새벽에 있었을 팀플지옥을 생각하면 이렇게 지각하고 졸만하다는 걸 다들 이해한다는 듯이 소영을 굳이 건드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광경을 살짝 멍하게 쳐다보던 소영도 졸던 눈을 비비며 간신히 공책을 챙겨 강의실 밖으로 기듯이 걸어나왔다. 그리고,
"뭐야, 그렇게 유니온이건 벌처스건 들어가고 싶다고 난리를 피우던 여자가 그렇게 졸고 있어도 되는거야?"
뭔가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서니, 쿠크리는 어디다 뒀는지 모르게 된데다가, 어디서 주워입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단추는 다 풀어헤쳐놓은 채 입고 있는 교복같이 생긴 검은색 옷을 입고 있는 나타가 벽에 기댄채 팔짱을 끼고 소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깜짝 놀란 소영이 굳어져있는 걸 본 나타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소영의 손목을 홱 낚아채고는 그대로 건물 뒷문 쪽으로 향했다. 끌려가면서 정신을 차린 소영이 나타에게 물어봤다.
"뭐, 뭐야. 어떻게 찾아온거야 여긴?"
"왜? 궁금하기라도 해? 키킥... 쓸데없는 호기심같은 건 품지 말라고. 이 나타님이 아무런 이유없이 네 앞에 나타날거라고 생각이라도 했냐?"
"이상한 얘기 늘어놓지 말고 본론부터 좀 얘기하자구. 내가 다니는 학교는 어떻게 알고 찾아온거야? 그리고 무슨 일로 찾아온거야 도대체? 위험하다는 생각은 하나도 없는거야? 깜짝 놀랐잖아."
소영의 물음에 나타는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여기를 몇 번 와봤다는 듯한 허세를 부려보면서 주변을 신기한 듯이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소영도 물론 나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벌처스에 소속된 위상능력자였던 흔적인 차원압력 발생 초커는 아직도 그의 목에 채워져있었다. 물론 이제 더 이상 그에게 초커를 이용해 괴롭힐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것을 끊어버릴 방도를 찾지 못하는 이상 그에게는 언제고 남아있을 구속의 흔적이었다. 더군다나 최보나와 정도연도 제거에 실패했던 것인만큼, 그의 운명의 무게가 얼마나 가혹한지를 문득 생각하고 지나가게 되는 소영이었다.
"...어이, 여기 뭐 먹을 데는 없는거냐."
"응? 먹을 데? 많지! 많은데 왜?"
"있으면 하나 안내해줘봐. 이 나타님이 슬슬 출출해지려고 하니까 말이야."
"뭐야 그건,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말을 해! 푸힛... 그래 그럼 이왕 이렇게 학교에 와준 김에 학식으로 한 번 데려가줄게!"
"학식? 그건 뭐냐 또?"
"학생식당말야 학생식당. 나같은 대학생들 그냥 학교에서 밥 먹는데 있잖아. 뭐, 썩 맛이 좋진 않은건 맞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너도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야. 참, 그리고 가기 전에..."
소영이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들어 나타에게 다가갔다. 소영의 손이 목 뒤로 넘어오자 나타는 순간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하고 말았지만, 소영은 그런 나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이 그저 알록달록하게 디자인된 손수건을 나타의 목에 둘러 장식해주었다.
"그 보기 흉한 건 좀 가려도 좋잖아. 점심시간 많이 지났어. 빨리 가보자."
"칫... 이딴 짓까지는 필요 없다고."
"아니, 필요하니까 하는 소리야. 너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알아보기라도 하는 날엔 무슨 사단이 날지 몰라? 넌 이제 벌처스 쪽이 아니라는 것도 그 때 플레인게이트에서 가면 아저씨한테 다 들었다구."
"흥, 잘도 그런 얘기들을 주절주절 떠들고 다녔겠다 그 인간. 뭐, 어찌됐던 상관 없어. 그나저나 빨리 가자고."
"...푸흣... 알았어 빨리 가자."
소영이 나타를 데려간 곳은 학교 광장 근처의 북적북적한 학생식당이었다. 줄서서 서로 떠들기 바쁜 행렬 사이에 온몸이 짜증으로 근질근질한 나타와 부스스하기 짝이 없는 소영이 나란히 서있었다.
"...이거 원래 이렇게 귀찮은거냐?"
"좀 기다려. 순서대로 먹는게 당연한거지."
"...짜증나게... 마음 같았으면 이미 여기는 한바탕 박살이 나고 남았다고."
"쉿, 그런 얘기는 좀 하지 좀 말고... 어쨌든 조금만 참어. 줄은 줄어들테니까."
그렇게 나타에게 매우 따분한 십몇분이 흐르고서야, 둘은 메뉴를 골라 계산대로 향했다. 소영은 기분좋게 나타의 것까지 계산을 마치고는 나타를 데리고 어느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마주보고 앉았다. 북적북적한 학생식당의 구석진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의 사이로 묘하게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뭐... 별로 맛은 없겠지만, 그래도 많이 먹어. 부족하면 좀 이따가 나가서 더 챙겨줄게."
"흥, 알았다고. 밥이야 깡통죽만 아니면 뭐든지 다 좋으니까 신경 끄시지."
"...근데 그 깡통죽이라는게 도대체 어떻길래 그렇게 항상 그렇게 질색인거야? 도대체 처우가 어땠길래 싶기도 하거든... 물론 그 때 봤던 것만 해도 많이 놀라긴 했었지만."
"...밥 먹는데 그런건 더 물어보지 말라고. 짜증나니까."
"...알았어. 더 물어보진 않을게."
소영의 작은 호기심으로 어두워진 분위기의 점심시간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고 난 뒤에, 남겨진 잔반(은 나타의 것은 하나도 없지만)을 내어놓고 두 사람은 다시 화창한 날씨의 캠퍼스로 되돌아왔다. 아직 여름의 끝자락을 꼭 쥐고 있는 나무들의 서글픈 합창이 울리는 작은 도롯가를 나란히 걷던 중, 근질근질하던 나타가 뜬금없이 이상한 질문을 해왔다.
"너 그, 먹을 것 파는 일은 그만둔 거냐?"
"뭐? 그거? 푸하핫... 아 그게 말이야. 어짜피 난 등록금을 벌려고 했던 일이니깐, 어느 정도 모았으니 잠시 접었지. 왜? 어묵 먹고 싶어서?"
"...풉... 그런거 때문인거 아니다."
"에이, 아니긴. 생각이라도 난거야? 뭐 까짓거 그런거라면 당연히 해줄 수 있지. 마침 지금 공강시간이라 수업도 따로 없는데 우리집에서 해주지 뭐."
"...그럼 빨리 앞장서던가."
"히힛... 알았어 가자. 일단 근처에 슈퍼 좀 들러야 돼. 재료를 좀 사야하니까 말야."
길을 알리가 없는 나타가 별로 관심 없다는 듯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앞서가는 소영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잠시 손으로 뭔가를 세던 소영은, 앞에 보이는 슈퍼로 들어가 국물을 낼 재료 몇 가지와 어묵을 순식간에 골라 사서 나왔다.
"자, 이거 좀 들어줘."
"...이걸 내가 왜 드는데?"
"에이, 어묵 한 번 먹게 해주겠다는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거 아냐?"
"흥, 알았다고. 어디까지 들고 가면 되는데?"
"저기야 저기. 얼마 안 멀어."
뭐 이런걸 시키냐는 식으로 툴툴댔지만 결국 나타는 소영이 맡긴 재료를 매우 신줏단지 모시듯이 들고 소영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리고 자취방에 도착해 문을 활짝! 연 소영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아침의 전쟁같던 지각사태를 십분 반영한 폭탄 맞은 듯한 난장판이었다.
"...아, 이거... 이건 말이지!"
"뭐야, 여자 사는 집이 이렇게 어지러워도 되는거야? 꼴이 말이 아닌데?"
"아, 이건 그냥 어쩔 수 없었어. 오늘 아침에 급한 일이 있었단 말야."
"칫, 핑계는 누구나 대는거지. 됐으니까 빨리 해준다는 거나 해달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나타는 목에 감겨있던 소영의 손수건을 풀어버리고는 자취방 침대에 편하게 드러누웠다. 소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취방의 작은 부엌 쪽 형광등을 켜고 국물 우려내기에 들어갔다.
내색하지 않았다지만, 소영은 나타가 이런 도피생활 속에 다소 지쳐있다는 걸 알았다. 강남 GGV에서, 플레인게이트에서 만났던 모습보다 조금 더 야윈듯한 모습에 안쓰러움이 더해졌다. 그 때는 나타가 왜 그렇게 자신에게 화를 내고, 치열했고, 절망을 내뿜었어야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왜 그랬어야했는지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건,
'캐롤씨가... 도와줬었으니... 이젠 좀... 알 것 같아.'
캐롤리엘의 기억 복구 실험에 참여했던 일 덕분이었다. 플레인게이트에서 우연히 나눈 이야기 덕분에 기억소거에 대한 걸 알게 된 이상, 소영은 실험 참여에 조금의 망설임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힘들었던 약물 복용 실험 이후, 부분적인 기억의 파편이 돌아온 뒤에는 나타를 생각하는 시선이... 약간 달라졌다고 하면 맞을 것 같다.
"나타, 일어나. 어묵 다 준비됐다구."
"...으음... 알았으니 좀 가져다줘. 피곤하고 짜증나니까."
"에휴, 알았어. 여기 가져다줄게."
소영은 자취방에 있는 가장 큰 스테인리스 그릇에 어묵 한 사발을 담아서 나타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러자 나타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자기 앞으로 온 어묵을 거부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먹기 바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소영의 입가에 뭔가 기분좋은 미소가 띄워졌다.
"...뭔데? 뭐가 좋아서 웃는거야?"
"아니 그냥,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
"푸흡...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어울리지도 않는 이상한 소리나 하지 말고 이거나 치워버려. 짜증나니까."
"아 아니야, 진짜야. 너 정말 귀여워. 어묵 진짜 잘 먹어주는거 고맙다니까?"
"...무슨 목적이냐? 뭐 때문에 나한테 이러는건데?!"
"왜냐면... 말이야."
마지막 말과 함께 소영이 나타에게 다가갔다. 순간 나타의 눈 앞이 아득해지면서 온 몸이 얼어붙었다. 그리고 소영의 손이 나타의 등 뒤에서 깍지를 끼고, 이마에 다가온 작고 촉촉한 감촉이 스치듯이 붙었다 떨어졌다. 순간 무슨 반응을 해야할지 뭔가 머릿속이 멍해지는 나타가 반사적으로 화를 내며 소영으로부터 떨어졌다.
"무, 무슨 짓이야 지금!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인지 알고 있는거야?"
"물론 알지. 너 지금 내가 강남에서 해줬던 그 말, 혹시 기억나?"
"...뭐야! 너 그 때 기억을 소거당했었잖아. 아니, 아니 잠깐 무슨... 이게 무슨..."
"맞아. 기억을 소거당했었지. 나도 알고 있어. 물론 누가 나한테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런건 중요한게 아냐. 혹시... 기억하고 있어?"
헐레벌떡 수업이 있는 건물 정문으로 뛰어올라간 소영은, 옆으로 스치면서 누군가 짜증내듯이 외치는 소리마저 들을 겨를 없이 그대로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서는 수업이 한창 진행중인 강의실로 뛰어들어갔다. 문을 살포시 닫고 조교에게 지각체크를 하고는 정해진 자리에 앉아서 숨을 고르며 책을 끄집어냈...
"왜? 궁금하기라도 해? 키킥... 쓸데없는 호기심같은 건 품지 말라고. 이 나타님이 아무런 이유없이 네 앞에 나타날거라고 생각이라도 했냐?"
"이상한 얘기 늘어놓지 말고 본론부터 좀 얘기하자구. 내가 다니는 학교는 어떻게 알고 찾아온거야? 그리고 무슨 일로 찾아온거야 도대체? 위험하다는 생각은 하나도 없는거야? 깜짝 놀랐잖아."
"응? 먹을 데? 많지! 많은데 왜?"
"있으면 하나 안내해줘봐. 이 나타님이 슬슬 출출해지려고 하니까 말이야."
"뭐야 그건,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말을 해! 푸힛... 그래 그럼 이왕 이렇게 학교에 와준 김에 학식으로 한 번 데려가줄게!"
"학식? 그건 뭐냐 또?"
"학생식당말야 학생식당. 나같은 대학생들 그냥 학교에서 밥 먹는데 있잖아. 뭐, 썩 맛이 좋진 않은건 맞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너도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야. 참, 그리고 가기 전에..."
"칫... 이딴 짓까지는 필요 없다고."
"아니, 필요하니까 하는 소리야. 너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알아보기라도 하는 날엔 무슨 사단이 날지 몰라? 넌 이제 벌처스 쪽이 아니라는 것도 그 때 플레인게이트에서 가면 아저씨한테 다 들었다구."
"흥, 잘도 그런 얘기들을 주절주절 떠들고 다녔겠다 그 인간. 뭐, 어찌됐던 상관 없어. 그나저나 빨리 가자고."
"...푸흣... 알았어 빨리 가자."
"좀 기다려. 순서대로 먹는게 당연한거지."
"...짜증나게... 마음 같았으면 이미 여기는 한바탕 박살이 나고 남았다고."
"쉿, 그런 얘기는 좀 하지 좀 말고... 어쨌든 조금만 참어. 줄은 줄어들테니까."
"흥, 알았다고. 밥이야 깡통죽만 아니면 뭐든지 다 좋으니까 신경 끄시지."
"...근데 그 깡통죽이라는게 도대체 어떻길래 그렇게 항상 그렇게 질색인거야? 도대체 처우가 어땠길래 싶기도 하거든... 물론 그 때 봤던 것만 해도 많이 놀라긴 했었지만."
"...밥 먹는데 그런건 더 물어보지 말라고. 짜증나니까."
"...알았어. 더 물어보진 않을게."
"뭐? 그거? 푸하핫... 아 그게 말이야. 어짜피 난 등록금을 벌려고 했던 일이니깐, 어느 정도 모았으니 잠시 접었지. 왜? 어묵 먹고 싶어서?"
"...풉... 그런거 때문인거 아니다."
"에이, 아니긴. 생각이라도 난거야? 뭐 까짓거 그런거라면 당연히 해줄 수 있지. 마침 지금 공강시간이라 수업도 따로 없는데 우리집에서 해주지 뭐."
"...그럼 빨리 앞장서던가."
"히힛... 알았어 가자. 일단 근처에 슈퍼 좀 들러야 돼. 재료를 좀 사야하니까 말야."
"...이걸 내가 왜 드는데?"
"에이, 어묵 한 번 먹게 해주겠다는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거 아냐?"
"흥, 알았다고. 어디까지 들고 가면 되는데?"
"저기야 저기. 얼마 안 멀어."
"뭐야, 여자 사는 집이 이렇게 어지러워도 되는거야? 꼴이 말이 아닌데?"
"아, 이건 그냥 어쩔 수 없었어. 오늘 아침에 급한 일이 있었단 말야."
"칫, 핑계는 누구나 대는거지. 됐으니까 빨리 해준다는 거나 해달라고."
내색하지 않았다지만, 소영은 나타가 이런 도피생활 속에 다소 지쳐있다는 걸 알았다. 강남 GGV에서, 플레인게이트에서 만났던 모습보다 조금 더 야윈듯한 모습에 안쓰러움이 더해졌다. 그 때는 나타가 왜 그렇게 자신에게 화를 내고, 치열했고, 절망을 내뿜었어야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왜 그랬어야했는지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건,
"...으음... 알았으니 좀 가져다줘. 피곤하고 짜증나니까."
"에휴, 알았어. 여기 가져다줄게."
"아니 그냥,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
"푸흡...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어울리지도 않는 이상한 소리나 하지 말고 이거나 치워버려. 짜증나니까."
"아 아니야, 진짜야. 너 정말 귀여워. 어묵 진짜 잘 먹어주는거 고맙다니까?"
"...무슨 목적이냐? 뭐 때문에 나한테 이러는건데?!"
"왜냐면... 말이야."
"물론 알지. 너 지금 내가 강남에서 해줬던 그 말, 혹시 기억나?"
"...뭐야! 너 그 때 기억을 소거당했었잖아. 아니, 아니 잠깐 무슨... 이게 무슨..."
"맞아. 기억을 소거당했었지. 나도 알고 있어. 물론 누가 나한테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런건 중요한게 아냐. 혹시... 기억하고 있어?"
"...기억... 못할 리가... 없지 않겠냐."
"네가 아직도 힘들고 어렵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플레인게이트에서 그런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겼다고 해도, 남겨진 네 얼굴은 여기저기에 퍼져있어. 나도 보고 있단 말야."
"......"
"그렇다고 내가 널 믿지 않을거라는 소리는 아냐. 난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 언제나 널, 응원하고 있으니까."
"...제길."
짜증과 비웃음이 섞인 표정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나타가 국물까지 다 해치운 그릇을 소영의 싱크대에 던져넣고는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화창한 하늘을 무색케하는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흥, 여우비인가."
이윽고 나타는 그를 따라 같이 일어선 소영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웃었다.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웃음을 보여줬다. 자존심 때문에 환히 웃어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하게 그의 감정을 담아낸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표정에 잠깐 놀란 소영도, 이내 밝은 미소로 그에게 화답했다.
"잘 생각해보라고."
"응? 어떤 걸 말야?"
"계속 나를 응원해도 될지 말이야. 분명 나같은 놈 때문에 후회하게 될텐데?"
"그게 그렇게 걱정이야? 푸흣... 나보다 널 걱정해야하는거 아냐?"
"흥, 그런 쓸데없는 걱정 필요 없다고. 난 안 죽어. 끝까지 살아남을테니까 두고 봐."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며 문 밖으로 나서는 나타의 뒷모습이 왠지 순간 당당한 듯 쓸쓸해보였다. 떠나기 직전의 마지막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슨 말인가를 전하려던 소영을 뒤로한 채, 나타는 여우비가 쏟아지는 하늘로 휙 날아올랐다. 마치 쏟아지는 비의 품에 안기려는 듯이.
"어묵 먹고 싶어지면 언제라도 와! 많이... 많이 해줄테니까!!"
나타의 뒤로 울리는 마지막 소영의 목소리가 빗속에 묻혀버리는, 언제쯤 멈추게 될지 모르겠는 강한 빗줄기가 쏟아지는 어느 날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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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M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