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겨론해 ㅍㅅㅍ
"그... 그러니까, 클로저는 이런 것도 해야하는건가요?"
"아 왜 도대체 이런걸 해야하는건데요? 안 그래도 바쁜거 아시잖아요 유정 누나."
"그거야 게임하느라 바쁜거지 다른 것 때문에 바쁜거니? 이왕에 주어진 일이라면 열심히 잘 해주렴. 두 사람에게도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은거야. 물론... 음... 그래 너희 마음은 조금 이해가 되긴 되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 흐르던 동아리방에 심상치 않은 갈등의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세하와 슬비, 유정만이 이 동아리방의 어색한 공기 속에 남겨져 있었고, 한 가운데 책상에는 심상치 않은 분홍빛을 띤 기획서가 눈에 띄었다.
'유니온 웨딩홀 홍보사진 촬영 기획안'
'주연: 이세하, 이슬비'
'기획: 유니온 홍보처 박심현'
애초에 이해할 수 없는 촬영안이라는 듯한 반응은 역시나 유정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유정도 일단 이 기획안이 내려온 이상 의문을 애써 뒤로한 채 기획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이 기획안이 내려오는 과정에서 중간다리 역할을 한 지부장의 말은 그야말로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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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게 무슨 기획안인가요? 웨딩마치라뇨! 아직 어린 나이에 클로저 활동으로 힘들고 바쁜 아이들한테 왜 이런걸..."
동아리방에서의 소식 전달이 있기 하루 전, 유니온 신서울 지부장의 사무실에 지부장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유정이 손에 들린, 문제의 그 기획안을 보여주며 데이비드 지부장에게 이 상황을 따져묻기 시작했다. 잔뜩 상기된 표정은 유정이 이 상황에 대해 가진 당황스러움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었다.
"유정씨. 음, 일단 자네가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네만, 우선 아이들이 유니온에 소속된 이상 유니온에서 필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도움을 줘야할 것도 있다네. 최근에 유니온에서 운영하는 대강당의 용도를 변경하는 작업이 거의 완료단계에 돌입해있네. 그래서 변경되는 용도 중에 웨딩홀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 박심현 요원에게 홍보 기획을 맡기니 이런 기획이 돌아왔네. 처음에는 사실 나도 약간 망설인 바가 있었지만, 문제는 말일세..."
"...문제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세하 군의 어머니, 서지수씨가... 어떤 루트에서인지는 몰라도 박심현 요원의 이 기획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어버린 모양이네. 그리고... 적극 찬성하신다는 연락을 좀 전에 갑작스럽게 보내오셨네."
"네?! 뭐라구요? 세하 어머니가 직접이요?"
"뭐, 그렇게 됐다네. 나도 오래 전부터 그녀를 멀찌감치서부터 봐온 입장이긴 하지만, 가끔씩 이렇게 정말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 참 나조차도 당황스럽다네. 뭐, 이렇게 된 이상 이 기획안을 진행시키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유정씨에게 이 기획을 좀 부탁해도 되겠나?"
"...그, 그렇게 된 이상 선택의 여지는 어짜피 없는 거잖아요? 후... 어쩔 수 없죠. 일단 두 사람에게 설명을 하고 논의를 해보는 걸로 해야죠."
"나도 이 지시가 약간 무리하다는 것은 잘 이해하고 있네만,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꼭 이 일이 진행돼야할 상황이 됐으니 이왕 하게 된 기획에 최선을 다해주길 바라네."
지부장을 처음 마주쳤을 때보다 더 큰 당황스러움을 품은 채 기획서를 챙겨들고 유정은 지부장실을 나섰다. 당장 내일부터 두 사람에게 이 촬영기획에 대한 브리핑을 해줄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지끈해왔다. 도대체 알파퀸 서지수는 왜 이세하와 이슬비의 웨딩촬영 기획을 찬성했는지 유정은 애초에 알 방법이 없었다. 왠지 알려고 하기도 난감할만큼 이 일은 참 그녀에게 있어서는 곤란한 일이었지만,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이 일을 무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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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기획을 반드시 진행할 수밖에 없는거야. 너희가 좀 이해하고 따라줬으면 좋겠다. 유니온에 소속된 요원으로서 유니온에서 요구하는 역할들을... 수행해줘야하는 건 사실이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왜 저한테는 상의도 없이 우리 엄마 맘대로 찬성하고 난리인거에요? 이슬비 너는 할 말 없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단 말야. 우리 얘기는 다 무시해버리고 어른들끼리만 대뜸 그렇게 정하는게 어딨냐고."
"...저, 저기 세하야. 조금만 진정하구, 일단 이렇게 맡겨진 일인 이상 우리가 해야하는 건 맞아. 임무니까, 그래 임무니까 일단 해야할 것 같아."
"...으으... 어짜피 이렇게 말 해봤자 엄마가 그랬을 정도라면 어짜피 싫다고도 못할 상황이잖아. 에휴, 어쩔 수 있나. 그냥 촬영해야지..."
뭔가 화가 잔뜩 나는 표정으로 반항해보려던 세하의 표정이 일순간 시무룩하게 누그러지고 말았다. 좀처럼 아들의 일에 나서지 않으시는 세하의 어머니였지만 이번만큼은 갑작스럽게 나서신 이유가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그런걸 물어봐봤자 이 촬영을 해야한다는 결론은 변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귀찮아진 세하는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아 포기한 듯이 게임에 집중하고 말았다.
"...그러면 일단 저와 세하에게 준비된 의상은 어디에 있나요?"
"일단 이제 촬영장으로 이동하면 있을거야. 가서 준비된 의상 입고 촬영에 들어가면 될테니까 걱정은 안 해도 좋고, 세하는 그 게임기 좀 그만 내려놔줄래?"
"...아, 알았어요. 지금 가면 된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이제 내려놓고 촬영장으로 가야해. 웨딩홀 내부 공사는 거의 다 끝나서 촬영할 수 있는 정도라고 했으니, 별로 문제는 없을거야."
그렇게 게임기를 집어넣은 세하와 자못 비장한 표정의 슬비가 유정의 차를 타고 유니온의 대강당 쪽으로 이동해갔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게임기를 놓지 않는 세하의 모습에 슬비가 평소처럼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즈음, 학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대강당 쪽으로 차가 도착했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뒤 3층에 있는 강당으로 이동한 세 사람은, 한창 웨딩홀 공사가 막바지에 다다른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내부 인테리어는 거의 다 끝난 듯 보였고, 자잘한 시설물 설치나 자재 정리, 청소만 하면 준비가 거의 끝나갈 것같은 분위기였다. 나름대로 화사한 분위기가 뭇 커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분위기를 뽐냈지만, 적어도 지금 이 곳에 있는 두 청춘남녀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돼요 유정 누나?"
"오옷? 오셨군요! 잘 지내고 계셨냐는!"
세하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근처에서 촬영 스탭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이것저것 의논하기에 바쁘던 덕이 넘쳐보이는 한 유니온 요원의 고개가 홱하고 돌아갔다.
"아, 박심현 요원. 오랜만이에요. 요즘도 유니온 홍보처에서 계속 승승장구하고 계시다는 소식은 들었는데요."
"허헛, 그러믄요! 전에 있던 감찰요원직도 나쁘지 않긴 했지만, 여기서 일하는 게 저한테 더 잘 맞고 즐거운 것 같은데 말이죠. 물론 워낙 이것저것 바쁘다보니 외부 사교활동 같은 걸 할 시간이 계속 줄어든다는 건 아쉽지만은."
"아, 그런가요. 그래도 즐거우시다니 다행인 것 같네요. 촬영 기획안은 모두 확인했어요. 세하와 슬비가 주인공이 돼서 웨딩홀 홍보영상을 찍겠다 그 말씀이신가요?"
"물론이고말구요! 강남의 영웅이자 푸르고 아름다운 두 청춘이 만나 사랑을 싹 틔워 그 결실을 얻어간다는 내용으로 준비가 될거란 말이죠! 분명 이 곳의 홍보로서 굉장히 뛰어나고 멋진 영상을 찍어낼 수 있을거라고 확신한다는!"
"...저기, 끼어들어서 죄송하지만, 정말 이렇게 찍어야만 하는건가요...? 하, 엄마는 왜 갑자기 이런거에 맘대로 좋다고 해버리신거야..."
한껏 꺼려진다는 반응을 보이는 세하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안경을 고쳐쓴 박심현 요원이 작정하고 세하에게 달려들어 폭포수같이 자신의 계획을 쏟아냈다.
"어엇! 이세하 요원! 이건 절호의 기회라구요. 지금은 이렇게 신서울의 영웅 검은양팀으로서 대중들 앞에 서게 되지만, 나중에는 이런 활동들을 계기로 분명히 자신만의 입지를 넓히고 인기있는 요원이 될 게 분명하다구요! 그러면 제가 기획하고 있는! 유니온 아이돌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 있는 기틀이 될거라는거죠!"
"...네?? 무슨 말이에요 그게! 아이돌이라뇨! 전 그런거 안 해요. 차원종하고 싸우는 것 때문에 게임할 시간도 매번 뺏기기 바쁜데 무슨 아이돌까지 하라는거에요! 전 그런거에 취미 없으니까 됐어요."
"음? 이세하 요원, 그게 무슨 말이죠? 제가 알기로는 이세하 요원도 노래를 좋아하고 잘 부르는 편인걸로 알고 있는걸요! 실제로 지금까지 플레이해온 게임들의 주제가는 대부분 부를 줄 알고 가끔씩 부른다는 것도 다 파악하고 있다는!"
"...아니, 아... 그런건 도대체 뭘 어떻게 파악하시는거에요?"
"후훗... 그런 건 알려줄 수 없는 영업비밀이라는!"
"뭐, 그렇...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지만 어쨌든 전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 신경 꺼주세요."
"하는 수 없군요. 그렇다면 이슬비양은 어떤가요? 가녀리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여전사로서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으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는!"
"...의상은 어디에 있죠? 가급적 빨리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크읏, 좋아요. 지금 당장은 이렇게 내 제안이 거절당하고 있지만 난 포기하지 않을거라는! 일단 그건 차후에 진지하게 얘기해보도록 하고, 준비된 의상은 저기 임시로 신부대기실에 칸막이를 설치해뒀으니 문제 없을거에요! 그쪽은 정리가 다 돼있어서 괜찮을거라는!"
"아, 예... 알겠어요. 일단 유정 언니 저희 의상 착용하러 들어가볼게요."
"으응, 그래. 혹시라도 불편하거나 어려운 점 있으면 도와줄테니까 얘기해."
조금 불편하다는 듯한 표정의 세하와 슬비는, 곧장 신부대기실로 들어가 의상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기획안을 놓고 유정과 심현은 스태프들과 간단한 회의를 진행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저희 다 준비 됐는데 나가도 되나요?"
"아, 그래. 너희들 모두 나와서 이제 슬슬 촬영을 해야할 것 같아."
유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신부대기실을 나선 두 사람의 모습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사뭇 남달랐다. 웨딩홀 홍보영상 촬영 컨셉에 맞게 준비된 의상이면서, 두 사람의 특징을 한껏 살려낸 의상 컨셉이 매력적이었다. 상하의로 깔끔하고 선이 살아있는 블랙 턱시도와 바지, 팔 소매와 바지 종아리 측면으로 새겨진 절제미 있는 푸르스름한 불꽃 선 문양이 시선을 빼앗는 세하의 의상도 이품이었지만, 풍성한 느낌을 가득 담은 순백의 버블 벨라인 드레스가 슬비에게 더해주는 기품과 우아함, 화려함 또한 굉장히 아름다운 느낌을 온 촬영현장에 전해주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분위기의 의상에 김유정도 놀란 눈치였지만, 박심현은 거의 기절할 정도로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감격해 마지않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그... 그래요! 바... 바로 이거라는! 으, 역시 검은양 요원들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외모도 빼어나죠! 이런 출중한 외모들을 아깝게 썩히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뭐, 일단 옷은 다 입었는데 이제 뭘 하면 돼요? 당장 할거 아니면 저 잠깐 게임 좀 해도 되죠?"
"세하야. 촬영 중에는 그 게임기 좀 안 봤으면 좋겠다. 슬비랑 같이 촬영을 해야할텐데 혼자 그렇게 게임기에 수시로 빠지거나 하지 말고. 이왕 촬영하게 된거 평소에 임무하던 것처럼 집중해서 임해주렴. 슬비 너도...? 슬비야? 슬비야?"
"...아! 네. 유정 언니. 부르셨어요?"
"뭐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거라도 있었어?"
"아, 아니에요. 딱히 그런 건... 없었어요."
뭔가 이상하게 살짝 상기된듯한 얼굴의 슬비였지만, 세하는 별로 그런건 모르겠다는 듯이 시종일관 시큰둥한 표정을 유지한 채 촬영이 있을 홀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갔다. 이윽고 촬영 스탭들의 준비가 모두 마무리가 되고, 박심현 감독의 연출에 맞춰 촬영이 시작됐다. 웨딩홀 구석구석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자세를 취하는 세하를 보는 심현의 시선이 썩 만족스럽지 않은 듯 했지만, 촬영은 딱히 중단없이 무난한 분위기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아, 이세하 요원. 이제부터는 미리 우리가 준비해둔 소품이 있으니 그걸 좀 같이 사용해보겠냐는?"
"무슨 소품인데요?"
"다른게 아니고, 이세하 요원이라면 당연히 상징으로서 건블레이드가 있지 않나요? 그래서 그걸 이번 촬영 컨셉에 맞는 소품으로 재구성을 해봤다는! 지금 입고 있는 의상과도 적절히 매치가 될테니 소품으로서 제격이지 않겠어요?"
"그래요? 그... 이 소품으로 같이 촬영을 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렇다는! 다만, 이거는 이세하 요원이 평소에 쓰는 건블레이드 같은게 아니고 그냥 소품이니까 잘못이라도 위상력을 여기다가 주입하면 소품이 단숨에 타거나 망가질테니 주의해달라는!"
"네, 알겠어요."
이윽고 소품 건블레이드를 받아든 세하가 그것을 이용해 이것저것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본 박심현은 또다시 뭔가 석연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잠깐만요 박심현 요원님. 잠시 세하와 얘기를 좀 나눠도 될까요?"
"으음? 무슨 얘기를 나누려고 하는거죠? 지금은 촬영에 집중을 해야하는 순간입니다만."
"잠깐이면 돼요. 이세하. 이리 좀 와 봐."
슬비의 호출에 소품 건블레이드를 어깨에 걸친 채 쫄래쫄래 다가오는 세하를 슬비가 잡아끌어 홀 구석으로 데려가서는 작게 혼을 내기 시작했다.
"이세하, 아무리 네가 이 일에 불편함이나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고 해도, 이건 임무야. 클로저라면 내려온 임무에 최대한 성실하게 임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
"너는 그러면 유니온에서 내려온 임무가 무엇이든지 사사건건 불평없이 다 따라야만 한다는거야? 아무리 임무가 너한테는 중요하다고 해도 이런 민망하고 속 보이는 일까지 다 도와줘야한다는거야?"
"이세하. 네가 무슨 마음으로 이 임무를 진행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임무에 있어서 그런 진지하지 못한 자세로 임하는 건 좋지 않다고 봐. 싫은 일이라도 일단 최선을 다하고 나서는 그 뒤에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
"이슬비 너도 이게 좋아서 하는 촬영은 아닐거 아냐? 난 솔직히 이걸 열심히 잘 할 자신도 없다고."
"...무, 물론 임무니까 하는거지. 나라고 이런거에 특별한 느낌은 없어. 정말이야. 그냥 임무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거지."
"......?"
"그, 그러니까 이 촬영 빨리 끝내고 쉬고 싶으면 차라리 좀 더 적극적으로 열심히 임하란 말이야. 그러면 금방 끝나고 쉴 수도 있을테고, 네가 하고 싶은 게임도 할 수 있을거... 아냐!"
"아, 알았어. 그렇게까지 열을 낼 필요는 없잖아. 알았으니 열심히 할게."
무언가 아까부터 조금 붕 떠있는 듯한 슬비가 이상했지만, 역시나 세하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여력 따윈 없었다. 그저 이 촬영이 빨리 끝나고 오늘 저녁에 있을 길드 단체 레이드나 준비할 생각밖에 없을 뿐이었다. 그렇게 세하의 얼마 남지 않은 개인 촬영이 마무리되고, 이어서 슬비가 투입되어 촬영에 들어갔다. 책임감 넘치는 리더답게 슬비는 주어진 촬영 과제를 대체적으로 무리 없이 소화해내는 모습을 보던 세하가 머릿속으로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문득문득 할 때쯤, 슬비의 촬영은 적극적인 자세로 금새 마무리가 되었다.
"자,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두 사람 함께 등장하는 커플샷을 찍어야겠군요! 흐흐흣... 이 순간을 위해서 준비해둔 나만의 촬영 포즈집까지 준비해왔다는! 스탭들도 어서 와서 이 자세들을 참고해서 촬영해봐요! 분명 좋은 홍보 사진이 나올거라는!"
"...흐음... 이거 두 사람한테 괜찮겠어요? 조금 과할 수 있는...데다가 무슨 키스신까지 있어요?"
"뭐, 뭐라고요? 뭐가 있다고요?"
박심현과 스탭들이 의논하는 소리를 귓등으로 듣고 있던 세하가 어떤 단어에 기겁해 촬영 스탭들의 틈바구니로 황급히 뛰어들어왔다. 그가 본 심현의 포즈집은 온갖 방법의 커플 스킨십에 더불어 군데군데 키스신까지 여기저기 섞여있었다. 갑자기 화가 잔뜩 난 세하가 심현에게 뭐라 소리를 치려던 순간, 슬비가 세하를 잡아끌고 촬영 중인 웨딩홀 밖으로 잠시 그를 끌어냈다.
"왜, 이슬비? 또 왜? 저걸 보고 내가 참아야한다는거야?"
"일단 진정하고 잘 들어봐 이세하. 나도 저걸 잠깐 보긴 했지만, 저기에 있는 포즈들을 100% 다 해볼 건 아니야. 거절할 건 확실히 거절할거야. 할 수 있는 선 안에서만 할 생각이니까 너도 씩씩대면서 그렇게 걱정하지 말고. 임무니까, 빨리 잘 마무리하자."
"...너 오늘따라 조금 이상한데... 저런거 원래 그렇게 잘 열심히 했었어?"
"아니 뭐, 특별히 그런 건 아닌데? 어짜피 나에게는 언제나 유니온에서 내려오는 임무가 최우선이었어... 정말이야. 그, 그게 다야."
"...하, 모르겠다. 그냥 모르겠으니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 알아서 잘 끊어줘."
결국 체념한 세하가 슬비와 함께 다시 촬영장으로 복귀하자, 기다리고 있던 박심현 감독이 둘을 불러 간단한 촬영 동선과 구도 등을 매우 열정적으로 설명해나갔다.
"그러니까 입구에서는 우선 손을 잡고 들어오면서 미소 짓는 표정을 보여줬으면 되겠고, 주례석 앞에 도착하면 서로 두 손을 잡고 눈 마주쳐주는 동작을 하면 된다는! 그리고 이어서 또... (뛰어가서) 이 위치에서는 이슬비 요원을 이세하 요원이 허리춤을 잡고 끌어안는 동작이고, 참 내 정신이야... 아까 다시 그 주례석에서 양 손을 맞잡은 채로 눈 마주치면서 이마도 맞대는 신이 있을거라는! 그 밖에도 몇 가지가 더 있지만, 시간이 부족하니 찍으면서 설명해주겠다는!"
"네, 알겠어요."
그렇게 몇 가지 설명이 덧붙여지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앞서 준비한대로 세하가 오른쪽에, 슬비가 왼쪽에 서서 한 손을 맞잡고 주례석 앞으로 걸어들어가기 직전과 걸어들어가는 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세하는 왠지 슬비의 한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것이 이상하게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촬영에 임하는 슬비를 보면서 최대한 마음을 다스린채 촬영용 미소를 조금씩 카메라 쪽으로 흘려보냈다.
"오케이, 지금 매우 좋다는! 조금 더 느리게 걸어가면 촬영에 조금 더 좋을 것 같다는!"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걸어가던 두 사람이 주례석 앞에 도착하고, 이어서 서로를 마주보고 두 손을 가볍게 얹어 잡는 자세를 취할 차례가 됐는데,
"...이세하, 왜 그래?"
"아, 아냐. 자, 잠깐만."
"으음? 이세하 요원? 빨리 진행해야죠.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알았다고요. 잠깐만요. 흐읍... 후..."
갑자기 깊은 한숨과 함께 역력히 긴장한 듯한 세하를 보던 슬비가, 세하의 손을 확 낚아채 자세를 바로 잡았다. 순간 세하가 깜짝 놀라서 주춤했지만, 슬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세하와 눈을 마주쳤다.
"이세하, 날 봐. 임무 중이야."
적극적이고 확실한 눈빛과 자세의 슬비에게 기가 죽은 세하는, 약간은 어색하지만 차근차근히 슬비의 리드에 따라 자세를 취하고 촬영에 임했다. 민망할 정도로 서로를 강하고 진하게 마주보는 장면에 박심현 감독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멈출 줄 모르고 있었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도 시선도 둘에게는 없었다.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하는 생각 뿐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눈을 쳐다보면서... 박심현 감독의 지시에 따라 이마를 맞대며 서로를 바라보다가...
'음...?'
그렇게 촬영에 몰입하던 세하의 심장이 어느샌가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언가 긴장을 해서인가? 촬영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랬던 건가? 갑자기 얼굴이 벌게지고 당혹스러웠지만, 슬비는 세하가 어떻든 이 촬영을 계속해서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없이 길게만 느껴진 두근두근한 짧은 순간이 지나가고, 그 다음 촬영은...
"자 이제 이 준비된 모형 웨딩케이크 앞에서 서로 허리를 끌어안아주면 된다는! 거의 마지막까지 왔으니 서로 힘내라는!"
이제는 거의 다 포기한 채 촬영에 완전히 몰입한 세하와 슬비는, 세팅된 모형 웨딩케이크 옆에서 서서 서로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잡...으려다 말고 세하가 살짝 망설이는 모습이 보였다.
"...후... 이세하, 가만히 있어."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미소와 함께 속삭인 슬비가, 망설이던 세하를 끌어당겨 허리를 감싸안았다. 전보다는 조금 덜 당황한 세하가 역시 마찬가지로 슬비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아주면서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한결 편안한 분위기로 서로의 눈을 마주칠 수 있게 된 덕분에 이후의 촬영 또한 생각보다 순조롭게 잘 이루어졌다. 그리고, 살짝 상기된 듯한 두 사람의 불그스름한 볼은 가벼운 보너스였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던 웨딩 홍보촬영이 모두 끝나고, 피곤하게 집으로 향하는 두 사람.
"에휴, 이거 찍은 걸로 애들이 놀리지나 않으려나 모르겠다."
"...그, 그야... 아마 좀 회자될만한 이야기이긴... 하려나..."
"뭐야, 아까는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이제 와서 걱정하는거야?"
"으, 무슨 걱정은 걱정이야? 으음, 그래도... 조금 걱정은 되긴 되네."
"그렇지? 아무래도?"
그러더니 슬비가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놀란 세하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슬비가 세하의 팔뚝 부근을 내리치면서 마구 웃기 시작하는 것이다. 덩달아 세하도 놀라면서 웃음이 터지는 바람에 한바탕 길거리에서 두 청춘남녀의 폭소가 울려퍼졌다. 그러다 문득 서로의 눈을 마주친 세하와 슬비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더니, 짐짓 아닌체하며 서로를 모른 체 집으로 향했다.
"근데, 다른 팀원들이 보면 뭐라고 할까. 아으으..."
"글쎄... 뭐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중요하진 않을지도 모르겠는데?"
"...? 그게 무슨 소리야. 이슬비."
"아니, 별 뜻은 아니야."
그렇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가벼운 슬비의 모습에서 어딘가 평소와 다른 느낌을 받은 세하였지만, 역시나 세하는 더 이상의 생각보다 그저 멍한 표정으로 게임기를 꺼내며 그녀의 뒤를 쫓아 걸어가는게 전부였다.
그리고 저 너머 석양은, 청춘처럼 눈부시게 두 사람을 빛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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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M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