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해 준비된 어두운 지하 공간. 어떠한 외부 통로도 허락되지 않은 철저한 밀실. 허름하게 미세한 구멍이 난 벽의 틈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이 닿는 곳에, 거미 한 마리가 자신이 만든 거미줄을 손수 보수하며 뽈뽈뽈 바쁘게 거미줄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돌아다니는 쥐마저 죽은 듯이 조용히 방을 가로질러 근처에 있는 드럼통에 얼씬대는 음산한 분위기의 장소.
그리고
"쾅!"
어느 누구의 발걸음도 허락하지 않을 것같은 곳에 두 명의 소년이 들어왔다. 푸른 분노의 눈빛을 한 소년이 허옇게 질린 혼미한 표정의 소년을 질질 끌고 들어온다. 그리고,
"툭, 쾅!"
정신을 놓은 채 겁에 질린 소년이 내동댕이쳐지고, 문이 닫힌다. 다시 암흑이다. 그리고 잠시 뒤, 천장에 간신히 매달린 백열전구가 점등된다. 그 불빛 아래로 내동댕이쳐진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옷이 여기저기 찢겨진 채 몸이며 팔까지 이미 가득했던 흉터 위로 붉은 상처들이 드러나있었다. 평소에 보였던 짜증섞인 불만스러운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깊숙히 숨겨져있던 내면의 공포가 얼굴에 고스란히 비춰졌다.
"...자, 앉아보시지."
명령에 움찔했지만, 쓰러진 소년은 함부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저 압도적인 두려움에 벌벌 떨기만을 반복했을 뿐.
"앉으라고 했잖아! 왜 앉질 못 하는거야! 내가 무서운거야? 어?! 빨리 앉으라고!!"
온 방을 뒤흔드는 고함소리가 울리고서야 소년은 정신을 차렸다. 분명 도무지 이런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협이 농담이 아닌 진실임은 확실했다. 이런 상황에 수도 없이 던져본 경험이 있는만큼, 나타도 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맞섰다.
"이 버러지 자식이...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러는거야? 뭐야! 뭔데!"
"...자, 진정하고... 천천히 시작하자고, 나타. 넌 내게 분명히 말했어. 넌 날 좋다고 했어. 그래, 네 마음을 네가 말해줬어. 그래서 나도 받아줬잖아? 안 그래? 엉?"
눈을 바싹 붙인 채 휘몰아치듯 말하는 분노와 탐욕의 소년 앞에 나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타에게는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나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사건이 이 소년을 불타는 흥분에 사로잡히게 했는지... 도무지... 도무지 냉정하게 판단하려 해도 계산이 서지 않는 것이다.
"아, 그래. 너무 무서워하진 마. 당연히 널 해칠 생각은 없다는걸 잘 알잖아? 네가 날 좋아했던 만큼 나도 널 좋아해. 그래, 그건 사실이야. 네 마음은 지금도 변함은 없지? 그렇지? 그럴거라고 말 해!"
소년은 마지막 외침과 함께 나타에게 다가가 강하게 입을 맞추었다.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입맞춤보다 불타는 것이리라, 나타는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푸른 불꽃을 가진 소년이었으니, 지금같이 흥분한 상태에서는 또 어떠겠는가? 위상능력자가 아닌 사람이 그에게 다가갔다간 바로 격렬한 화상을 입을만한 상황이었다.
잠시 굳어진 채 소년의 기습을 받아야했던 나타는 그대로 세하의 제어되지 않는 위상력과 바등바등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그리고 영원같은 짧은 순간이 지나고,분노의 소년, 세하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지는 듯한 분위기였다. 세하는 나타를 등진 채 뒤로 돌아서 몇 걸음을 걸었다. 잠시 이 상태를 진정시키는 소강상태인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같은 위상능력자로서의 나타는 느낄 수 있었다. 알파 퀸의 아들, 바로 그의 앞에 서있는 이세하로부터, 그동안 어느 누구로부터도 경험할 수 없었던 강대한 위상력의 흐름이 있음을. 그리고 그로 인해, 이 방에 있는 본인이 심각한 위험에 처할 것임을.
"나타..."
"......"
"...나타!!"
"ㅇ..왜 부ㄹ...부르는거냐?"
"너... 너 기억해?"
"...뭐...뭘 말이냐?"
"너... 내 꿈에... 나왔었어..."
말을 하면서 등을 돌려서는 세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타는 숨이 멎는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힘이 그 몸 속에 잠자고 있었다. 그가 움직이는 순간, 나타는 무너져내려야만 할 것이다. 이 공간도... 온전할 수 있을까?
"너... 내 꿈에서... 나와 함께였어... 강렬했다고... 난 아직 기억하고 있어... 넌 어때? 어땠어? 그 짜릿했던 순간이 아직 네게 남아있어?"
"...그...그만 해! 버러지 자식 그건 꿈이었을 뿐이잖아! 왜 꿈을 지금 나랑 연결하려고 드는거야!"
"넌... 넌 나한테 지금처럼 해선 안 되는거야. 날 봐. 내 얼굴을 보라고. 내 눈빛, 내 숨결, 내 작은 움직임까지 놓쳐선 안 되는거잖아? 아냐?"
다시 백열전구 밑으로 들어온 세하. 산발된 머리 때문에 그 눈빛은 아직 가려졌지만, 나타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이, 마지막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것을. 자신은 한 번도 겪지 못했고 느낄 수도 없었던, 세하 본인만의 꿈 하나가, 지금의 끝자락으로 자신을 인도했음을 끝내 한탄하지 못할 것임도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냐? 아닌거야? 아니냐고! 넌 왜 그 때처럼 날 대해주지 못하는거야! 왜! 왜! 왜!!"
분노한 세하가 나타의 목을 양손으로 부여잡아 들어올렸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상황에 나타는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온 힘을 담은 압박에 나타는 공중에 뜬 채 자신이 가진 위상력으로 애써 저항하는 것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세하가 속삭였다.
"넌... 왜... 왜 이러는걸까... 꿈 속에서는... 이러지 않았다고..."
툭, 눈이 뒤집히는 생명의 끝자락에서 다시 되돌아왔다. 나타가 꺼억꺼억대며 고통스러운 목을 부여잡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너... 그러지 마... 넌 나를 봐야해... 넌 나와 함께여야만 한다고... 넌... 지금의 넌 너무 뜨겁지 않아..."
차가운 불꽃이 세하를 감싸고 돌았다. 냉정과 열정 그 사이, 둘 사이의 공간이 침묵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