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길지 않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점심시간의 신강고등학교 검은양 팀의 동아리방.
- 이세하. 나타는 잘 지내는거야?
- 어? 아 물론... 잘 지내지. 특별한 일은 아직 없어.
말 그대로였다. 한바탕 습격 사건과 이주 소동으로 정신없었던 그 때를 빼고는 무난하고 평범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나타는 학교에 돌아온 뒤, 당연스럽게도 매사가 귀찮다고 짜증난다는 태도로 일관하고는 있었지만, 적어도 상처나 피해가 가는 행동은 굳이 하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가 그런 일에 휘말려서는 안 되는 처지이기도 했고, 꽤나 본인도 그런게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라는 걸 강조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학교로 돌아온 뒤로 되도록 곤란한 일은 엮이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였다.
세하의 집에서도 그다지 튀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저 학교에서 돌아온 뒤 밤만 되면 방에서 강한 기합소리와 함께 몸을 단련하는 듯한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을 뿐이다. 그리고, 세하는 그 기합소리와 활동이 어쩐지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세하 스스로도 왜 굳이 그런 상황에서 신경이 쓰여야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 때 나타의 습격 이후로 단순히 앞으로가 걱정되나보다 싶은 애매한 마음이라고 애써 정리했다.
- 자 모두 잘 들어줘. 우선, 지금 나타가 학교로 온지 시간이 충분히 됐어. 하지만, 세하와 유리가 쭉 봐왔듯이 그렇게 적응이 잘 되어가는 것 같은 모습은 아니야. 그래서 우선, 내일 학교 일정이 모두 끝난 후 조촐한 환영식을 좀 하려고 해. 학교에 온 뒤로 갑작스러운 일들 때문에 아직 혼란스러워 보이니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해.
- ...난 별로 내키진 않는걸.
- 이세하,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너는 좋든 싫든 어쨌든 같이 살고 있는 입장이잖아. 그리고 네가 나타에 대해서 아직 감정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이건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작전이라고. 우리는 이 임무에 사명감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해. 물론 나타가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면 더욱 좋고.
- 그래요! 처음에 우리와 마주쳤을 때는 그저 사납게 우리를 대했지만, 학교에 오신 뒤로는 예전에 봤던 것 보다는 나은 모습이잖아요. 세하 형도 파티에 한 번 잘 참여해줬으면 좋겠어요.
- 동생, 너무 그런거에 마음 쓰지 않는게 좋아. 어짜피 세상 모든 클로저가 우리같은 사람일리 없는건 오히려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그렇죠... 너무 잘 알아서 탈이죠...) 사람도 다양하듯이 클로저도 다양하고 그런 중에 좀 말 안 듣고 말썽피우는 어린애들도 있는 법이라고. 일단 우리가 품어보기로 도전한 이상 그렇게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모습만 내비치려고 하지 마. 내가 볼 땐, 썩 괜찮아질 수 있는 놈이라고.
- ...알았어요.
- 자! 그럼 우리 모두 준비를 해야겠지? 오늘 내로 준비할거지 않아 슬비야?
- 음, 일단 환영식과 관련해서는 간단한 파티를 진행할 예정이야. 적당한 케이크와 다과를 준비하면 될거라고 생각해. 나타를 위해 좀 더 확실히 준비할거니까 다들 내일까지 필요한 부분 다 체크하고 종례 끝나자마자 나타를 불러서 환영식을 하자.
- 알았다고.
그리하여 시작된 환영 파티 준비. 특별히 거창하고 요란하게 할 생각 없이, 소소하게 서프라이즈 파티 스타일로 꾸미기로 했다. 슬비가 미스틸테인과 환영 케이크를 만들기로 했고, 유리는 제이 아저씨와 함께 동아리방 내부 꾸미기를 진행하기로 했다(를 빙자한 개판 5분전인 내부 정리...). 지금까지 나타에게 검은양팀 동아리방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방 주변의 검은양팀 동아리방 이름표도 빼놓고 최대한 겉으로 티를 내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세하는 따로 무언가를 준비하도록 하기가 어려웠는데, 나타와 함께 사는 입장에서 괜한 티를 냈다가 서프라이즈가 깨지면 그것도 그것대로 난감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뭔가 해줄 수 있는게 있지 않을까 하는 세하는, 나타가 방에서 두문불출하는 사이 부엌으로 나와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참을 부엌에 있다가, 다 만든 것을 쥐고 2층으로 올라온 세하는, 두 방문 앞에 있는 좁은 복도 끝 창문에 걸터앉아있는 나타를 보게 되었다. 운동으로 땀에 젖은, 온갖 상처가 뒤덮은 험하고 단련된 몸이 그대로 드러난 나타가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거라고는 하늘과 집 담벼락 구석의 조그만 정원 밖에 없었지만, 그런 밖을 진지하게 보고 있는 나타의 눈빛 속에 알 수 없는 깊음이 있었다. 평소에 찾아볼 수 없었던, 귀찮음과 짜증으로 가려온 무언가가 있었다.
나타의 모습에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빠져들어 서있었던 세하에게 나타가 고개를 돌려 말한다.
- 왜? 짜증나게 왜 쳐다보는데?
- ...아 아냐. 너야말로 거기서 뭐하는건데?
- 됐어. 밖은 볼만큼 다 봤어. 짜증나게 하지 말고 빨리 너도 방으로나 들어가.
- 내 방 내가 들어가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너도 들어가 그럼. 그 전에 우선 씻고.
- ......
한참을 쳐다보다 찔린 세하가 나타에게 소심하게 쏘아붙이자 나타는 두른 수건을 손에 휙 휘둘러 고쳐잡은 뒤에 세하를 지나쳐 1층 욕실로 향했다. 지나쳐간 나타를 보던 세하는, 그 길로 다시 방으로 돌아가 침대로 직행했다. 분명 나타가 세하가 손에 든 그것을 못 보고 지나쳤을리는 없다. 다만 적당한 크기의 봉투에 가려져있어서 나타가 신경 안 쓰고 지나갔을 확률도 있는 것이다.
내일 학교로 가져갈 이것을 미리 책가방에 챙겨두며 불안함과 민망함에 혼자 잠깐 부르르 떨었던 세하는, 이내 그것에 대한 신경을 싹 꺼버리고 게임에 몰두하려하자, 이어 다가오는 생각은 방금 전에 마주친 나타에 대한 것이었다. 그저 평소에는 서로의 방에 틀어박혀있느라 보지 못한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나타가 창가에 앉아서 무언가 창밖 멀리를 내다볼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그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그가, 왜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을까? 갑자기 닥쳐온 온갖 생각 때문에 흐트러진 정신을 수습하기 위해 세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잠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방 구석에 있는 창밖을 본 세하는 문득, 찬란한 푸른 별빛이 하늘을 수놓은 풍경을 보게 되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신서울의 하늘. 평소엔 그런 것에 무심하던 세하도, 감성에 푹 젖은 지금같은 순간에는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해야할까...
문득 문 밖에서 다 씻고 올라온듯한 나타가 복도를 지나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정신이 든 세하는 다시 게임에 몰두하려고 하지만, 복잡해진 마음은 좀체 가라앉질 않는다. 결국 게임을 더 하는 것을 포기하고 침대에 누운 세하. 여느 때와 달리 잠이 금방 오는 듯하다. 쏟아지는 잠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세하는 나타에게 생각으로 저녁 인사를 건넨다.
= 잘 자고, 내일 보자 나타.
아침이 밝고, 또 다시 같은 아침 일상이 반복된다. 아침잠이 많지 않은 나타가 먼저 일어나서 내려가고, 세하는 침대 위에서 부스럭부스럭대다가 어머니의 잔소리에 마지못해 일어난다. 아침을 먹고, 집에 보관된 장비와 책가방을 챙겨 학교로 향한다. 물론 나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타는 집을 나옴과 동시에 사이킥 무브로 뛰어올라가고, 세하는 다시 학교로 가는 길을 뛰어서...
- 엨?
갑자기 나타가 세하를 낚아채더니 날아오른다. 목덜미 쪽을 잡혀서 켁켁거리는 세하를 무시한 채 몇 번의 착지와 이동 끝에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에 도착한다. 갑작스러운 비행에 당황스러운 세하는 먼저 앞서가는 나타를 향해 불만을 담아 툴툴댔다.
- 야, 말도 없이 낚아채서 날아가냐?
- ...빨리 등교시켜줘도 불만이냐. 매번 짜증나게 넌 왜 능력도 있는 놈이 두 발로 뛰어서 가냐?
- 그거야 우리 엄마가 일상적인 일에는 위상력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하셔서지. 너도 우리 엄마 보고 살면 그 말 함부로 무시 못 하는거 알만하지 않냐?
- ...쓸모없게... 앞으로 학교 갈 때는 내가 끌고 갈테니 그런 줄 알고 있어. 귀찮은 짓을 골라서 하는 것보다 짜증나는 건 없으니까.
- ...어이, 그럼 니가 날 끌고 오는 것 자체가 귀찮은 짓 아니냐?
- ...그냥 빨리 가라
뭔가 이상한 의미의 말을 남긴 나타가 먼저 발길을 재촉했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세하가 그를 뒤쫓아서 C반 교실로 향했다. 교실에 도착하니 웬일인지 일찍 온 유리가 북적북적한 교실 사이에서 세하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이번 환영식을 유리도 꽤 신경을 쓰고 기대하는 모앙이다. 유리의 뒤에 보이는 나타는 유리의 그런 모습이 또 귀찮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다시 창밖을 본다. 아직 아무것도 모를 나타를 생각하면 세하마저도 잠깐잠깐 피식 웃음이 나오지만, 나타에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참고 노력했다. 정말로 별로 티내지 않고 최대한 무난하게(특히 세하는 어젯밤의 일로 더더욱) 하루 일과를 쭉 보낸 멤버들은, 계획했던대로 종례가 끝나자마자 동아리방으로 들어가 서프라이즈를 준비했고, 집으로 향하기 위해 짐을 싸고 있는 나타에게 유리가 다가가 다급한 척 불러냈다.
- 나타! 가방 다 챙긴거야? 지금 빨리 같이 좀 가자. 너 데리고 갈 곳이 있어!
- ......?
- 빨리! 시간 없다고!
갑작스러운 유리의 부름에 나타는 또 시작인가 하고 그다지 신경쓰지 않은 채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역시나 나타를 순순히 동아리방으로 오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것인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서유리가 누구인가? 서둘러 떠나려는 나타를 낚아채듯이 붙잡아 순식간에 동아리방 앞까지 끌고 와버린 것이다.
- 켁켁... 짜증나게 뭐하는 거야? 집에 가려는 거 안 보이냐?
- 야 나타, 집에 가는 것도 가는 건데 지금 네가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내가 널 굳이 붙잡아 불러낸거라구! 자, 여기 니 눈앞에 보이는 문 있지? 거기로 열고 들어가.
- ...칫 또 난 뭔가 했네. 어제 그 버러지가 부엌에서 열심히 뭔갈 했던 모양인데... 이것 때문이었던거냐?
- ...뭐? 세하가 뭘 했었어?
- 나도 걔가 뭘 했든 상관할 바는 아냐. 하지만, 어제 그 집 부엌에서 냄새가 났었던데 이거였을 줄이야.
- ...에라잇!
이미 뭔가 눈치채고 있는듯한 나타를 보면서 흔들린 유리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 문을 열고 나타를 밀어넣어버렸다. 그리고,
- (퍼펑)
폭죽소리는 들리는데 그 뒤에 있어야할 대사가 들리질 않는다. 동아리방 안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세하가 엄청 눈총을 당한 모양이다. 민망한 표정의 세하가 동아리방에 들어온 나타를 쳐다본다. 나타의 표정이 일그러지지만, 그건 화로 일그러진게 아니다. 유치하고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비웃음이라고 표현하는게 적절할까?
- ...어쨌든 나타, 함께 하게 된걸 환영해. 앞으로도 편하게 잘 지내보자.
- 그래 뭐, 이왕에 온거 친구 하나 못 만들고 나가는 것만큼 아까운 것도 없잖아? 나타 너도 돌아온 김에 한 번 노력해보자고.
- 제이 아저씨 말이 맞아요! 나타 형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모일 수 있게 됐으니 함께 재밌었으면 좋겠어요!
검은양 멤버들의 환영멘트가 잇따라 들려오지만, 나타는 그런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는 듯이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이크와, 세하가 어젯밤에 나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했으나 생각보다 허무하게 들통나버렸던, 쿠키를 흘겨보고 있었다. 이윽고 멤버들의 열렬한 시선과 함께 세하가 만든 쿠키 하나를 집어먹은 나타. 의자에 걸터앉아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올리며 쿠키를 먹는 모습에서 평소에 쉽게 보지 못할 각이 살아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세하가 잠시 감상모드에 돌입하다 움찔하던 사이, 나타는 이내 이런 상황에 흥미를 잃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 ...이런거 준비할 시간에 너희들 클로저 요원이라는 임무나 잘 할 생각들 해. 쓸데없는데 낭비하지 말라고. 별로 고마워할 것도 없으니 그만 가본다.
동아리방을 나서려던 나타와 문 앞에서 약간 멀뚱히 서있던 세하가 순간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나타는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세하의 머리를 한 번 스윽 스치듯 쓰다듬더니 입꼬리 한 쪽을 올리며 동아리방 문을 나섰다. 뻥찐 표정으로 나타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세하의 뒤로 유리와 슬비가 쿡쿡대면서 웃고 있었고, 제이는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얘기했다.
- 뭐, 그닥 관심을 보이진 않긴 했지만, 성의 표현은 된 것 같군. 아무래도 이세하 네가 좀 해낸 것 같은데... 안 그래?
- ㄴ...네? 뭐가요?
- 동생, 눈치 있게 상황파악 좀 하자고. 웬만하면 평범하게 끝났을 어색한 환영식이었는데 네가 몰래... 몰래? 어쨌든 만든 쿠키 덕분에 이 정도는 된거라고.
- 그...그런가요? 그럼 뭐...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건가요?
- 그래! 세하 네가 그래도 센스있게 한 건 해준 덕분인 것 같은데? 약간 곤란할 뻔하긴 했지만 다행이야 다행! 좋았다구!
- 뭐 부탁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나름대로 좋았어. 자, 이제 그럼 우리 모두 방을 정리하고 해산하자.
- 저, 슬비 누나! 이 케이크 우리 좀 먹으면 안 될까요? 열심히 다들 준비한 건데 이대로 두고 가기엔 좀 아까워요.
- 아냐 테인아. 지금 나타가 이 케잌을 두고 가긴 했지만, 이 케잌은 우선 나타꺼야. 그러니까 일단 세하가 챙겨서 나타한테 가져다주는걸로 하자.
- 뭐, 그래봤자 걔는 눈길도 안 줄 것 같긴 하지만 말야.
긴장에 사로잡혀있던 분위기가 풀리고 다시 다소 밝아진 분위기의 검은양팀 동아리방. 불안불안하고 싱거웠지만 어찌됐든 좋은 결말이 난 듯한 환영식을 정리한 멤버들은 다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맑은 햇살을 받으며 서로 즐겁게 장난을 치고 놀아주는 미스틸과 유리를 보는 제이의 눈빛도(비록 가려져있지만) 환해보인다. 슬비는 다시 또 유정과 통화를 하고 있고, 세하는 케이크를 챙겨들고 역시나 게임을 하고 있다. 맑은 하늘 아래 검은양 멤버들의 걱정 중 하나도 일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저 멀리 날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환영식을 마치고 난 뒤에도 깊은 고민에 잠긴 한 사람이 있었으니,
= 그나저나... 어젯밤이나 방금이나 왜 자꾸 나타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걸 가지고...
여전히 구름이 잔뜩 낀 듯 혼란스러운 이세하의 머릿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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