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야
생일 축하해
그리고 미안해
더 잘해주지 못해서
그 날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세하는 방 침대에 누워 틀어박힌 채 게임을 하고 있었고, 여느 때와 다르게 세하의 집 근처가 매우 분주했다. 이른 새벽부터 마당에 있는 조그만 정원에 무언가를 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임을 하다가 그대로 조용히 머리를 박고 잠든 세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언가를 심는 작업을 마친 복면 일당은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와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둥근 해가 떴다.
조용히 아침밥을 먹으러 내려온 세하의 앞에는 생일다운 미역국상이 차려져 있었다. 피곤에 찌든 채 먹는둥 마는둥한 세하가 엉금엉금 화장실로 들어가 씻고 나온다. 주섬주섬 게임기와 가방을 챙겨 나오는 세하를, 잘 가라는 인사와 함께 보내주는 그의 엄마. 그리고 집을 나서자마자 게임기를 손에 들고 몰입한 세하. 정원에 몰래 심은 아기자기한 사시나무 묘목이 민망해지는... 그런 순간이다.
게임을 접속해보니 또 유저 생일이라고 게임에서 챙겨주는 생일 축하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 기분은 썩 나쁘진 않긴 했지만 문득 오늘이 본인 생일이라는 걸 게임을 통해서야 깨달았다는 사실이 좀 허탈하다. 차원종들과 매 순간 생사를 걸고 싸워온 나날들이었기 때문에 그런걸 애초에 따질 수 있는 여유도 있을리가 없었다. 물론 당장이라도 호출이 나오면 재빨리 동아리방으로 달려가 복장을 챙겨 출동해야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생일인 오늘도 전혀 변함이 없는 것이기도 했다.
잔뜩 졸음이 몰려오는 몸을 이끌고 학교에 도착한 세하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과를 보내야 했다. 아무리 생일이라고 할지라도 학교에 그런 생일까지 일일이 챙겨줄리는... 사실 딱히 없다. 그리고 자기의 생일인 것이 교실 내에 알려질 경우 돌아올 후폭풍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인데다가, 위상능력자인 세하는 그런 것에 역으로 저항하는 것도 원천적으로 금지가 돼있으니 참으로 곤란하고 딱하기 그지없는 입장이기도 하다. 딱히 생일에 대해서 주변 친구들에게 알린 적도 없으니 세하는 그냥 오늘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향하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하루 학교 일과가 마무리되어가는 시간, 종례를 마친 세하가 집으로 가기 위해 가방을 싸들고 교실 문을 나서는 순간,
"으웁?! 뭐, 뭐야!"
누군가가 뒤에서 세하의 입을 막은채 세하의 덜미를 잡아 질질 끌고갔다. 갑자기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만 크게 부릅뜬 세하는 깡그리 무시한 채, 우격다짐의 부드러운 손길이 세하를 잡아끌고 어디론가로 데려가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대충 끌려가는 경로를 보고 있자니, 세하가 항상 봐오던 익숙한 루트다.
'...동아리방?'
이게 동아리방으로 가는 루트라면, 지금 이세하를 끌고 가고 있는 이 손의 주인도 왠지 알 것만 같다.
"웁... 으웁... 야... 서유리!"
"응? 들켰어? 에잉 뭐야. 도착할 때까지 입막음 시켜놓으려고 했더니만..."
"야, 어딜 데려갈거면 말이라도 해줘야할 것 아니야?!"
"몰래 조용히 해주려고 했던거지. 에휴, 차라리 그냥 기절시켜버리는 게 나았으려나?"
"...너 그 말 진심이냐?"
"푸하핫, 물론 농담이지 농담! 뭐, 그래도 네가 진짜로 저항이 심했다면 그랬을지도?"
유리의 마지막 말에 말문이 막히는 세하였다. 어쨌든 걸린 마당에 끌려갈 이유는 없으니 유리는 세하를 풀어줘 일으켰다. 딱히 별 말 없이 함께 동아리방 앞에 도착한 유리와 세하. 유리는 잠시 세하를 잠시 기다리게 한 뒤 먼저 동아리방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는 세하의 귀에 내부에서 시끌시끌한 무언가를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뒤, 유리가 문을 빼꼼 열고는
"이세하! 들어와!"
라고 말했다. 시큰둥하게 동아리방으로 입장한 세하는, 곧 펼쳐진 광경에 약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구해온건지 쭉 나열돼있는 이쁘장하게 꾸며진 검은양요원 도플갱어 인형들이 책상 위에 늘어서 있었는데, 이세하 인형을 제외한 4개의 인형이 케이크를 둘러싸고 있었고, 생일케이크 위에는 이세하 인형이 장식처럼 놓여있었다. 그리고 준비된 다양하고 아기자기한 간식들이 세하를 반겨주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뭐긴 뭐야! 니 생일이잖아! 우리가 모를 줄 알고 있었던거야? 이거 실망인데 이세하?"
"세하형 생일이라고 해서 우리가 얼마 전부터 열심히 준비해놨다구요! 생일 축하해요 세하형!"
"어이, 얘들아. 우리 세하 동생 생일이니만큼 오늘은 세하한테 준비한 거 잘 챙겨주고 하자고. 대장 따로 할 말은 없어?"
"어... 음... 이세하. 생일 축하해."
가볍고 담백하게 축하 메시지를 전하는 슬비를 마지막으로 가벼운 축하인사를 마치고는, 케이크 위에 준비된 양초에 유리가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긴 것 하나와 짧은 것 8개, 그의 18번째 생일이다. 물론, 무사히 불이 붙여졌을리가 없었다. 인형에 가까운 양초 하나에 불을 붙이다가, 불이 살짝 인형에 옮겨붙고 만 것이다. 그 덕분에 인형의 옆구리 소매가 살짝 타버렸는데, 모습이 어째 묘해서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슬비는, 별것도 아닌 그것에 살짝 놀란 듯 얼굴이 상기돼있었다.
"에잇, 그냥 실수야 실수. 자 이제 불을 끄자구!"
"(다함께)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이. 세. 하!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세하가 촛불을 후 하고 불었다. 시원한 입김에 촛불들이 꺼지고, 다시 방에 불이 들어왔다.
"자, 얘들아. 이제 준비한 것들을 꺼낼 때가 되지 않았어?"
"참! 이제 꺼내보자."
모두가 각자 준비한 선물들을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먼저 가볍게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 제이가 세하에게 수상한 물통을 건넸다.
"자, 이거 받아."
"이게 뭐에요 아저씨?"
"뭐긴, 이 형님이 개발한 특제 성장차라고. 너 아직 한창 클 나이에 키가 그래서야 돼겠어? 아저씨하고 눈 마주칠 정도는 돼야하는거 아냐?"
"뭐긴, 이 형님이 개발한 특제 성장차라고. 너 아직 한창 클 나이에 키가 그래서야 돼겠어? 아저씨하고 눈 마주칠 정도는 돼야하는거 아냐?"
"아, 괜찮은 것 같은데요. 신경써주신 건 감사한데 전 아직 이대로도 괜찮다고요. 그리고 키는 아저씨가 너무 크다는 생각 안 해보세요?"
"어이 동생, 그래도 키는 크고 보는게 좋은거야. 한 번 시음해봐. 괜찮을테니까."
"아이 참, 그래요 그럼... (...)켘... 이게 뭐, 뭐에요? 뭘 도대체 넣은거에요?"
"거 참, 이 비법을 아무한테나 가르쳐 주는 법은 없다고.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쓴 법이지."
"아니 아까는 괜찮을거라면서요?! 말이 왜 달라요?"
"그래서... 이 형님이 마음을 써준게 싫기라도 한단 말인가?"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 (...) 헉, 내가 이걸 왜 마시고 있지?"
"그것 보라고. 결국에는 그 차의 매력에 빠져들 줄 알았어. 그래, 나중에 더 필요하면 얘기하고. 내년 생일까지 1년 이용권 보장해주마."
"...더 부탁드릴 일 없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제이에게 받은 선물을 봉인한 세하에게 이제는 나머지 세 명이 한 번에 선물을 전해준다.
"자자, 우리가 준비한 것도 있다구! 이거는 목걸이! 너 6월 3일 쌍둥이자리잖아? 쌍둥이자리 모양을 닮은 목걸이...라고 했던가?"
"심벌."
"아아, 심벌즈...? 심벌즈는 다른거 아냐?"
"...상징 말야 상징."
"아, 미안... 알았어 알았다구! 어쨌든 그거야 그거! 한 번 목에다 걸어줘볼까?"
"음 잠깐, 일단 걸어주기 전에 다른 선물도 주자. 일단 테인이가..."
그러면서 미스틸테인은 세하에게 푸른빛 띤 흰 꽃다발을 전해주었다.
"전 꽃을 준비했어요 형! 이게 그... 어, 무슨 꽃이라고 했죠?"
"아마."
"아마... 어떤거요?"
"아마."
"슬비 누나, 그러니까 아마 다음에 뭐가요?"
"꽃 이름이 아마야."
"...아... 맞다. 제가 사놓구 까먹은 거 있죠... 우웅... 어쨌든 이 꽃이 세하형 생일에 맞는 꽃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준비했어요."
"크흐흡... 그래 고마워 미스틸."
"어... 그럼 이제 난가? 여기 내가 준비한 건..."
"이게 뭐야?"
"이건 진주 팔찌야. 네 생일에 맞는 탄생석이야. 장부의 권위와 건강을 상징당하고 해."
"음... 그래?"
"어어? 잠깐만, 슬비 너 지금 그 탄생석에 있는 뜻 그거 뭐야? 그냥 아무 생각없이 주는 건줄 알았더니 그런 뜻도 다 있는거였어? 너 그 뜻 뭔가 있는거 아냐? 수상한데?"
"응? 아, 아냐아냐. 그, 그런거 없어! 얘는 무슨 왜 못 하는 말이 없어."
"그... 그래, 유리야. 슬비가 그냥 나한테 탄생석으로 해서 주려고 한 거지 별 뜻은... 없어보이는걸?"
"흐음... 그렇단 말이지. 좋아. 그렇다고 해주고 넘어갈게!"
"(둘이 동시에)그렇다고 해주는게 아니라 그게 아냐!"
"어어? 푸훗... 푸하핫!!"
뭔가 유리가 몰고가는 분위기에 휩쓸려 항의하다가 동시에 얼굴이 살짝 벌게지는 슬비와 세하였다. 그러던 사이에 제이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중요한 통화를 하더니, 전화를 끊고 멤버들에게 말을 했다.
"여어, 자 지금 세하 생일을 기념해서 유정씨가 한우를 사들고 오고 있다고 하니까 다들 여기서 기다리고 있자고. 어른도 둘이나 있으니 적당히 불을 써도 괜찮을테고, 뭐 곤란하다면 세하 동생꺼 무기를 좀 빌려도 되겠지."
"네? 지금 제 건블레이드에다가 무슨 소리를 하시는거에요?!"
"크하핫, 농담이야 농담! 이런 날에 가벼운 농담 하나도 못 하겠어?"
그렇게 잠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멤버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동아리방 문이 벌컥 열리면서 김유정이 방으로 들어왔다.
"자! 오래들 기다렸지? 세하 생일이라고 하는데 관리요원이라는 사람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 특별히 출혈을 감수하고 한우 사왔으니까 다들 잘 먹고 힘내자고!"
"와아아! 유정 언니 최고! 한우다 한우야!"
'...저기 유리야... 내 생일인 것 같은데?'
동아리방 창문을 활짝 열고, 준비된 한우를 잘 구워서 즐겁게 나눠먹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장난기가 발동한 유리는 세하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 테이블 위의 케이크에서 인형을 빼내고는 조심스럽게 세하의 뒤로 접근해 세하의 얼굴에 엎어버렸다. 모두가 이 광경에 빵 터져 웃음이 멈추지 않았지만, 그렇게 웃던 와중에도 슬비는 방에 마련된 스포츠타월을 가지고 세하의 얼굴을 조금 닦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생일 파티가 모두 마무리되고, 멤버들은 생일인 세하에게 일체 일을 주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알아서 동아리방을 열심히 정리를 한 뒤 생일 마무리를 잘 하라는 인사와 함께 헤어지기로 했다.
뭔가 기대하지 않았던 깜짝 이벤트 덕분에 생각보다 발걸음이 가벼워진 세하는 매우 늦은 하교길이지만 마음만큼은 매우 상쾌했다. 심지어 평소에는 그렇게 머리를 처박고 놀기 바쁠 딱 이 시간대에 게임기에 손마저 가지 않는 신기하고 날아갈 것같은 기분이 세하를 감싸고 돌았다. 그렇게 기분좋은 발걸음으로 룰루랄라 집으로 향하던 세하가, 문득 등 뒤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등 뒤로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푸른색 삐친머리를 스치듯 본 기억까지를 남긴 채 세하는 무언가에 강하게 얻어맞으면서 기절을 하고 말았다.
기절한 세하가 깨어나는데는 그나마 다행히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뒷목의 급작스러운 뻐근함을 느끼면서 자세를 일으킨 세하는, 자신이 자기의 집 정원에 내던져져있는 걸 깨달았다. '이 자식이... 그래도 기절시켜놓은거 치곤 얌전히 놔줬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세하는 잠시 아픈 목을 부여잡고 정신을 수습하다가, 아침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정원의 사시나무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나무에 걸린 귀여운 디자인의 엽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Boys, be ambitious! 세하 선배 생일 축하해요! - 귀엽고 듬직한 후배 김가면'
우욱, 하는 토쏠림과 함께 세하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이게 무슨...
그렇게 자세를 일으키던 세하의 바짓주머니에 무언가가 또 걸리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이물감에 바짓주머니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본 세하는, 이윽고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주변을 홱홱 돌아봤다.
'어이 버러지, 니 선물이다. 그 기분 나쁘게 생긴 말라깽이 상인자식이 너한테 전해달라면서 몰래 부탁하던데, 이딴건 어디다 쓰려고 하는거냐? 어쨌든 전해준다.'
말라깽이... 상인자식... 지금은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그 사람, 김시환임이 틀림없었다. 세하는 뜻밖의 놀라운 선물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자신의 생일을 잊지 않고 힘겹게 도피하던 와중에도 이런... 최신 게임팩을 선물해준 것이다. 세하가 게임하는 걸 여느 누구만큼이나 질투했던 그였지만, 세하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들, 고마워요. 정말 진심으로.'
약간 뻐근한 목을 부여잡고 챙겨놓은 소중한 선물들과 함께 세하는 집 앞 현관으로 향했다. 이제 집으로 들어가면, 또 다시 집안일을 해야하고, 또 다시 새로운 하루를 준비해야할테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만큼은 세하에게 정말 소중하고 특별한 날로, 깊이 기억하고 싶은 날이 될 것만 같았다.
푸른 별빛에 잠겨드는 아름다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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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mMak